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201354
한자 佛像 - 咸安人- 微笑
분야 종교/불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함안군
집필자 조재영1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경상남도 함안군

[정의]

경상남도 함안 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불교의 성행과 불상 속에 깃든 함안인의 미소.

[함안 지역 불교의 유입]

경상남도의 18개 시군 중 하나인 함안군은 타 지역에 비해 남아 있는 불교 관련 유물의 수가 많지 않다. 그러나 도항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연화문 장식의 금동판편과, 조상기(造像記)가 남아 있어 통일 신라 8세기 말~9세기 초의 불상 양식을 잘 보여 주는 함안 방어산 마애 약사여래 삼존 입상(咸安防禦山磨崖藥師如來三尊立像)[보물 제159호] 등을 통해 이른 시기부터 이 지역에 불교가 성행하였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함안 지역 불상의 도상을 통하여 '불상 속에 깃든 함안인의 미소'를 찾아보고자 한다.

함안은 충절과 문물을 겸비한 고장이고 전통과 인심이 살아 숨 쉬는 고을이다. 이곳 함안은 가야 제국 가운데 하나인 아라가야(阿羅伽耶) 고도(古都)로서 문화재 발굴에서 나온 유물 등을 통해 당시 불교 수용의 가능성을 짐작할 수 있다. 사적 제84호였던 함안 도항리 고분군 8호분에서 출토된 연화문 장식 금동판편은 함안 지역에 불교가 수용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두께 3㎜ 내외의 얇은 청동판에 7엽인 연화문을 새기고 금으로 도금한 것으로 연화문의 1/3 정도만 남아 있다. 복엽의 연화문은 선각으로 문양을 새겼는데 너무 작은 편들로 수습되어 전체적인 유물의 정확한 형태는 알 수 없다. 불교에서 연꽃은 가장 더러운 흙탕물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에 어떠한 상황에서도 바른 정진을 하는 자세로서의 의미가 있다. 또한 연꽃은 부처의 대좌로 사용되어 부처가 있는 극락정토의 상징으로 간주되었으므로, 사찰의 건축물이나 불교 조각, 불교 공예, 불교 회화 등 여러 분야에 연화문 장식이 사용되었다.

5세기 후반 아라가야의 최고 지배자급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도항리 8호분에서 출토된 연화문 장식의 금동판편은 함안 지역에 불교가 수용되었다는 근거로 충분하다. 또한 아라가야의 대표적 토기 문양이 새겨진 불꽃무늬 굽구멍 토기[화염문 투창 토기]를 단순히 불꽃모양의 굽구멍이 새겨진 토기로만 인식할 것이 아니라, 고구려 고분 벽화에 나타나는 옆에서 본 연화문의 변형된 것으로 이해하여 아라가야의 불교 유입 증거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함안의 전통 사찰 원효암과 장춘사]

함안 지역의 전통 사찰로는 비록 사세는 약하지만 원효암(元曉庵)장춘사(長春寺)가 대표적이다. 원효암은 함안 지역에서 가장 오랜 전통을 가진 사찰이다. 667년(문무왕 7)에 원효(元曉)와 의상(義湘)이 수행 정진을 위하여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의상은 661(문무왕 1)∼667년까지 국내에 거주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효암과의 관련성은 희박하다. 또한 원효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 사찰은 전국에 매우 많기 때문에, 이것은 원효와 의상의 명성에 가탁하여 원효암의 창건 설화를 만들고 원효와 의상을 추모한 것으로 짐작된다.

1370년(공민왕 19)에 원효암이 중창되었다고 하지만 당시의 기록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원효암은 1992년에 의상대가 보수되었고, 2004년에 대웅전이 새롭게 만들어졌다. 원효와 의상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전하지만 이것을 입증할 만한 기록이나 유물이 전하지 않아 아쉽다. 그러나 전설은 반드시 그 내용상의 증거물과 함께 전승이 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으므로, 원효암 전설을 통해 함안 지역에는 통일 신라 시대에 불교문화가 융성하였다는 사실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장춘사는 815년(헌덕왕 7)에 무염 국사(無染國師)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낭혜 화상무염이 왜적의 침범을 물리치자 왕이 그 보답으로 함안 칠북면 영동리무릉산 자락에 절을 세워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815년에 무염이 창건하였다는 것에 대해서는 무염의 당시 나이도 문제려니와, 충청남도 보령의 성주사(聖住寺)에 머물렀다는 무염이 어떻게 창원 지역의 여러 사찰을 창건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에 의문을 가지게 한다.

장춘사에는 고려 시대에 조성된 장춘사 석조 여래 좌상(長春寺石造如來坐像)[경상남도 유형 문화재 제7호]과 장춘사 오층 석탑(長春寺五層石塔)[경상남도 유형 문화재 제68호]이 남아 있지만 사적기가 전하지 않아 창건 이래의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없다. 조선 시대에 가서야 1530년(중종 25)에 증수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32 「칠원현(漆原縣)」 불우조에 무릉산에 천계사와 장춘사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을 통해 장춘사칠원현을 대표하는 사찰임을 알 수 있다. 1750년(영조 26)에 제작된 지도책인 『해동 지도(海東地圖)』에도 칠원현에는 천계사와 장춘사가 표시되어 있고, 1757(영조 33)~1765년(영조 41)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를 보면 천계사는 폐사가 되었지만 장춘사는 여전히 사세를 유지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폐사가 되기도 하였지만 1970년 말부터 중수가 이루어졌다.

[함안 지역의 불상들]

함안 지역에 분포하는 불상 가운데 먼저 함안 방어산 마애 약사여래 삼존 입상이 있다. 이 불상은 함안군 군북면 하림리에 위치한 방어산의 절벽에 새겨진 약사 삼존불 입상으로 801년(애장왕 2)에 제작되었다. 약사불은 약사 신앙을 대변하는 불상으로 인간의 질병을 치유해 준다고 한다. 한국에 『약사경(藥師經)』의 명칭이 처음 기록된 것은 7세기 초반이므로 이것을 근거로 약사 신앙의 도입 시기를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신라의 경우는 그보다 앞선 진흥왕 대, 즉 6세기 중엽에 『약사경』과 그 신앙이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통일 신라의 불교 신앙은 중대와 하대가 많이 다르다. 간단하게 정리해 보면, 중대[654~780]에는 아미타 정토 신앙이 유행하였고, 하대[780~935]에는 선종 신앙·약사 신앙이 유행하고 비로자나 불상의 조성 등이 많이 이루어졌다. 하대에는 많은 자연재해와 질병이 연이어 일어났으므로 이러한 사회적 배경은 약사 신앙을 유행시켰을 것이다. 함안방어산에도 이러한 이유로 커다란 마애불을 조성하여 하대 신라의 혼란을 극복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함안 방어산 마애 약사여래 삼존 입상은 가운데 약사여래 입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선각 기법으로 새겼다. 삼존상의 오른쪽 여백에 있는 불상 조성기를 통해 801년에 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어, 이 불상은 비교적 이른 시기인 1963년 1월 21일에 보물 제159호로 지정되었다. 본존인 약사여래는 소발의 머리에 육계가 큼직하고 높게 솟아 있다. 좁은 이마에 백호가 표현되어 있으며 눈은 가늘고 길게 새겼다. 코와 입 주위를 조금 더 깊게 오목새김하여 윤곽을 강조하였다. 귀는 길고 목은 굵고 넓은 삼도를 표현하였다. 어깨는 좁고 둥글며 상체에 비해 하체가 길어 어색한 느낌을 준다. 옷차림은 통견의 형식이며 옷깃은 'U' 자형으로 가슴 깊이 파여 있다. 손 모양은 오른손은 가슴 앞쪽에 들어 손바닥을 밖으로 하여 펴고 있으며, 왼손은 가슴 아래에서 약합을 받쳐 들고 있다. 두 발은 벌려서 연꽃 대좌 위에 서 있다.

협시 보살인 월광보살과 일광보살은 약사여래를 향해 신체를 약간 틀고 있는 형태이다. 머리는 보관을 쓰지 않고 묶어 올렸다. 얼굴의 이목구비는 본존불인 약사여래와 비슷하고 큰 귀와 목에 표현된 굵은 삼도 등도 본존불과 동일하다. 본존불의 왼쪽에 있는 일광보살은 월광보살에 비해 눈꼬리를 살짝 올린 표현 등으로 남성적인 면을 강조하였다. 두 손은 모두 들어 가슴 앞쪽에 두고 있다. 본존불의 오른쪽에 있는 월광보살의 눈은 수평에 가깝게 새겨져 있어 온화하고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방어산 마애 약사여래 삼존 입상은 확실한 연대를 가지고 있는 조각으로서 통일 신라 조각 편년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두 번째로 함안 대산리 석조 삼존상(咸安大山里石造三尊像)이 있다. 보물 제71호로 지정된 불상으로 대사골이라 불리는 마을 앞에 있다. 본존불과 좌우 보살상은 하나의 삼존불로 보기는 어렵고, 보살상은 손 모양만 다를 뿐 조각 수법은 동일하다. 가운데 본존상은 머리 부분과 광배 및 신체의 일부가 깨어진 상태이다. 법의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우견 편단의 옷차림을 하고 있으며, 두 손은 결가부좌한 다리 위에 아미타여래의 수인 가운데 하나인 상품 상생인(上品上生印)을 결하고 있다. 하체는 결가부좌한 윗부분만 남아 있어 발이 약간 남아 있을 뿐이다.

좌 보살상은 머리에 두건같이 생긴 보관을 쓰고 있다. 길쭉한 얼굴에 가는 눈, 길고 납작한 코, 작고 두꺼운 입술 등이 평판처럼 조각되어 생동감이 없이 경직된 느낌이다. 왼손은 아래로 내려 정병을 잡고 있고, 오른손은 배 부근에 대고 있다. 옷차림은 마치 부처의 대의처럼 천의를 가슴에서 'Y' 자형으로 여미고 허리에서 띠로 묶었다. 양쪽 다리 위에는 동심 타원형의 주름을 표현하였고, 다리 사이에는 꽃 모양이 새겨진 매듭을 늘어뜨리고 있다. 대좌는 상대와 하대로 이루어져 있다. 상대에는 홑입 연꽃 문양이 3단으로 표현되었고, 하대에는 겹입의 겹연꽃 문양이 새겨져 있다. 우 보살상은 좌 보살상과 세부 모습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표현 수법은 거의 같다.

세 번째로 장춘사약사전에 봉안되어 있는 장춘사 석조 여래 좌상이 있다. 이 불상은 왼손에 약합을 들고 있어 약사여래상임을 알 수 있다. 나발의 머리에 둥글고 큰 육계가 솟아 있다. 불상의 신체는 넓은 어깨에 가슴은 당당하게 펴고 있으며, 무릎의 폭이 넓어서 안정감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귀는 매우 길고 가늘며 코와 입도 작다. 목은 짧은데 삼도는 표현되어 있지 않다. 옷차림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우견 편단의 형식이다. 어깨에서 내려오는 네 줄의 옷 주름이 오른쪽 겨드랑이에 걸쳐지며, 왼쪽 팔뚝에도 어깨에서 흘러내린 옷 주름이 손목 부근에 걸쳐 있다. 왼손은 결가부좌한 다리 위에 올려 약합을 받쳐 들고 있고,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수인을 하고 있어 통일 신라 시대 약사여래상의 계보를 잇는 불상임을 알 수 있다. 광배는 배 모양 거신광 내부에 원형의 머리 광배와 몸 광배를 굵은 돋을새김의 띠로 표현하였다. 장춘사 석조 여래 좌상은 통일 신라 시대 약사여래 좌상의 형식을 따르고 있으나 신체 세부 표현이 투박하고, 살은 올라 있지만 양감이 부족하며 세부 표현도 정교하지 않아 고려 시대의 불상으로 판단된다.

네 번째로 함안 백암사 석조 여래 좌상(咸安白岩寺石造如來坐像)이 있다. 이 불상은 함안군 함안면 북촌리백암사(白岩寺)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다. 불상의 높이는 122.7㎝이며, 불신과 대좌가 남아 있다. 불상은 전체적으로 마모가 심하고 수리의 흔적이 많아 원래의 형상을 파악하기가 매우 어렵다. 결가부좌한 좌상으로 오른손은 오른쪽 무릎 위에서 아래로 내리고 있는 촉지인을 결하고 있으며, 왼손은 후대에 보수되어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얼굴은 파손되어 보수한 부분이 많고, 옷 주름의 형태도 파악하기 어렵다. 그러나 불상에 비하여 대좌는 비교적 상태가 양호한 편으로 불상의 연대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대좌의 하대는 팔각으로 각면 1구씩 안상이 조각되어 있다. 그 위에 새겨진 복련은 단판 8엽으로 연잎이 두툼하고 연판 사이로 간엽이 표현되었다. 복련의 상단에선 3단의 중대석 받침을 두었다.

중대는 8각으로 각면 우주를 모각하였으며, 높이가 높지 않아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준다. 상대는 중대 위로 2단의 부연을 설치하였으며, 그 위로 총 16엽의 복련을 표현하였다. 연잎의 중심부에는 삼엽형의 문양을 시문하여 장식성을 강조하였다. 함안 백암사 석조 여래 좌상은 변형과 파손 및 보수 등을 통해 보존 상태가 매우 좋지 않다. 하지만 대좌는 비교적 잘 남아 있어, 대좌에 조각된 문양과 연꽃의 표현 방식으로 살펴볼 때 통일 신라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판단되어 2011년 4월 28일에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529호로 지정되었다.

[바위 속에 면면이 이어지는 미소]

불상 조상기가 남아 있는 함안 방어산 마애 약사여래 삼존 입상과 장춘사 석조 여래 좌상을 통해 함안 지역에 약사 신앙이 유행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함안 대산리 석조 삼존상의 수인은 그 예가 매우 드문 상품 상생인을 결하고 있어 불상의 도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그런데 현재 함안 지역에 남아 있는 불상의 얼굴에서 함안인의 미소를 찾는 작업은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불상의 얼굴은 보는 사람마다 모두 다 다르게 느끼기도 할 뿐만 아니라, 불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그 불상을 바라볼 당시의 느낌에 따라 확연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불상의 미소를 규정짓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또한 함안 지역에 남아 있는 불상의 숫자가 그다지 많지 않아 여기에서 불상 제작 당시 함안 지역 사람들의 미소를 확인한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과제라 할 수 있다.

한편 불상 속에 깃든 함안인의 미소를 찾는다는 것은 함안 지역만을 조사한다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 전체 불상의 얼굴에 나타나는 미소에 대한 집중적인 분석이 있어야 할 것이다. 또 하나 쉽지 않은 점은 세월이 많이 지나다 보니 석재가 마모가 되어 불상의 얼굴이 많이 훼손되면서 정확한 얼굴 상호를 알 수 없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따라서 해명할 수 있는 자료들이 부족한 상황에서 불상 속에 깃든 함안인의 미소를 찾는 것은 매우 어려운 과제라 생각된다. 사실 신라 중대가 되면 불상에서 미소가 사라지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신라 하대에 제작된 불상에서 미소가 표현되는 것은 오히려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다행히 함안 방어산 마애 약사여래 삼존 입상 가운데 우 협시 보살인 월광보살의 얼굴은 온화한 표정에 살짝 미소를 머금고 있어 통일 신라 후기 함안 지역 여인네의 아름다운 얼굴을 떠올릴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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