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200369
한자 古墳
영어공식명칭 Tumulus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함안군
시대 고대/삼국 시대
집필자 김석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경상남도 함안군

[정의]

경상남도 함안 지역에 있는 삼국 시대의 무덤.

[개설]

고분(古墳)이란 지하 또는 지상에 매장 시설을 만들어 시신을 안치하고 그 위에 흙이나 돌 등을 높이 쌓아 올려서 만든 무덤을 말한다. 옛 무덤을 뜻하기도 하지만 고고학에서는 개념적으로 엄격히 한정하여 특정 시기, 즉 고대 국가 형성기에 만들어진 무덤으로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보통 삼국 시대의 무덤을 지칭한다. 죽은 자의 시신을 의도적으로 처리한 흔적은 후기 구석기 시대부터 확인되며, 시신의 처리 방법은 크게 땅에 묻는 토장(土葬)과 물속에 넣는 수장(水葬), 야외에 시신을 두는 풍장(風葬), 불에 태우는 화장(火葬)의 형태로 이루어진다.

우리나라에서는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를 거치면서 집단과 그 구성원 내에 계급이 발생하여 계층화되고, 그 양상이 더욱 심화되면서 무덤의 구조, 규모, 부장 유물 또한 계층별로 차이가 나게 되었다. 신석기 시대에는 별다른 시설 없이 땅속에 시신을 묻는 토장묘와 항아리 속에 시신을 넣어 매장하는 옹관묘가 있었고, 청동기 시대에는 거석문화의 산물인 고인돌이나 돌널무덤[석관묘], 독널무덤[옹관묘] 등 다양한 방법으로 시신을 처리하였다. 시신과 같이 매장된 부장 유물로는 붉은 간 토기, 민무늬 토기와 간 돌검, 돌화살촉 등이 있다. 청동기의 실용성이 소멸되고 철제 도구가 널리 보급되기 시작한 기원전 3세기 무렵, 철기를 이용한 농업 생산력의 증대와 철제 무기를 활용한 정복 전쟁이 활발하게 진행되어 지역적으로 크고 작은 단위의 정치체가 발생하기 시작하는 소위 삼한 시대가 시작되었다.

[변천 및 현황]

삼한 시대 전기·중기 무덤의 형태는 돌널무덤과 널무덤[목관묘], 독널무덤 등으로 나타난다. 이 중 널무덤은 땅을 깊게 파서 내부에 통나무나 판재로 관을 만들어 시신을 안치하고 유물을 부장한 삼한 시대 전기·중기의 대표적인 무덤으로서, 함안 지역에서는 가야읍에 위치한 함안 말이산 고분군(咸安末伊山古墳群)의 북쪽 구릉에서 약 40여 기가 발견되었다. 삼한 시대 후기에는 새로운 형태의 덧널무덤[목곽묘]이 출현하게 되었는데, 이 덧널무덤은 앞 시기의 널무덤에 비해 규모가 커지며 유물을 부장할 수 있는 공간이 따로 만들어지는 형태로서 시신을 안치한 널과 유물을 부장하는 덧널로 구성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함안 지역 내에서 확인된 삼국 시대의 고분군은 약 100여 개소로, 가야읍을 중심으로 하는 가야권을 비롯하여 군북권과 칠원권으로 권역을 나눌 수 있다. 이 중 가장 규모가 큰 함안 말이산 고분군은 함안의 대표적인 고분군으로, 아라가야[安羅國] 지배층의 묘역이 형성되어 있으며 대형 봉분만도 약 40여 기에 달한다. 봉분 주변으로는 수백여 기의 중형·소형 무덤이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외에도 인근에 수십 기의 대형분이 조성된 함안 남문외 고분군(咸安南門外古墳群)이 위치하고 있어 당시 현재의 가야읍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는 말이산을 중심으로 지배층의 무덤이 계획적으로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밖에도 군북 지역의 수곡리 수곡 고분군(藪谷里藪谷古墳群)과 옹당골 고분군, 칠원의 용산 고분군 등이 각 권역에서 규모가 큰 고분군으로 알려져 있다.

함안 지역에서의 삼국 시대 고분은 덧널무덤과 돌덧널무덤, 돌방무덤[석실묘] 등 형태가 다양하게 분포하고 있다. 덧널무덤은 김해, 부산, 경주 등 타 지역에 비해 늦은 시기인 4세기 대에 출현하며 타 지역에 비해 규모나 부장 유물이 매우 빈약하다. 4세기 대의 돌덧널무덤은 덧널무덤에 비해 아주 적은 수가 확인되고 있으나, 5세기 전반이 되면 함안 말이산 고분군에서 마갑총(馬甲塚)과 같은 초대형 덧널무덤이 축조된다. 무덤의 규모나 구조에 있어서도 많은 변화가 생겼으며, 덧널무덤은 감소하고 돌덧널무덤으로 유형이 일원화되었다. 4세기 대에 축조된 돌덧널무덤에 비해 5세기 대의 돌덧널무덤은 그 규모나 축조 기술 등이 더욱 발전하였고, 아라가야의 지배층은 거대한 봉분을 쌓아 그 지위 등을 과시하고자 하였다. 즉, 이러한 초대형 고분군의 출현은 지역 집단 내에서 절대적인 지배 계층이 등장하게 되었음을 나타내며, 가야읍함안 말이산 고분군을 비롯한 법수면황사리 분묘군(篁沙里墳墓群)과 윤외리 고분군(輪外里古墳群), 칠원면의 오곡리 유적(梧谷里遺蹟)에서 이 시기의 유적이 확인되고 있다.

돌덧널무덤의 등장은 함안 지역뿐만 아니라 무덤 형태의 출현 배경과 양상에 있어 인근의 고령, 합천 지역 등과도 거의 동일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함안 지역에서는 함안 말이산 고분군을 기점으로 수많은 돌덧널무덤이 축조되기 시작하였다. 그 규모도 3m 이상의 중형·소형 무덤을 비롯하여 7m 이상의 초대형 무덤까지 다양하다. 특히 5세기 후반대의 초대형 무덤에서는 네 벽에 방형의 독특한 감실 모양의 구조가 확인되며, 무덤 내부에 피장자와 함께 여러 구의 시신을 같이 안치한 순장의 습속도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양상을 종합해 볼 때 돌덧널무덤이 축조되던 5세기 중반에서 6세기 전반까지가, 무덤의 규모나 구조에서뿐만 아니라 각종 금동 장신구를 비롯한 풍부한 부장 유물이 출토되는 등 함안가야 세력의 최대 전성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대표적 유적으로는 함안 말이산 고분군과 칠원 오곡리 유적 등이 있다.

6세기 전반이 되면 돌덧널무덤의 축조가 쇠퇴하고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굴식 돌방무덤[석실묘(石室墓)]이 등장하게 된다. 굴식 돌방무덤은 한 번만 사용하는 앞 시기의 무덤 양식에 비해 여러 차례 추가장이 가능한 가족묘의 형태이며, 부장 유물 또한 적은 양만이 부장되는 등 기존의 무덤 형태와 장례 제도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러한 변화는 당시에 유행하였던 불교 혹은 도교의 영향을 받은 결과로 추정되며, 함안 지역에서는 함안 말이산 고분군에서만 굴식 돌방무덤이 확인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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