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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201346
한자 漢文學
영어공식명칭 Chinese Literature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함안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집필자 정정헌

[정의]

조선 시대부터 개항기까지 경상남도 함안 지역에서 이루어졌던 한문으로 된 시, 학문, 한학 등을 통틀어 이르는 말.

[함안의 한문학 환경]

함안 지역의 한문학(漢文學)은 조선 왕조의 건국과 함께 본격적으로 발전할 계기가 마련된다. 고려 왕조가 망하자 금은(琴隱)조열(趙悅)과 모은(茅隱)이오(李午) 등은 경상남도 함안 지역으로 내려왔다. 그들은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면서 함안 지역에 학문의 뿌리를 내리게 되고, 그 후손들과 지역 선비들이 그들의 학문과 문학에 관심을 가짐으로써 함안이 문향(文鄕)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조선 건국 이전의 함안 지역 한문학에 대해서는 고찰이 어려움으로 제외하고 함안의 한문학을 조선 전기, 조선 후기, 개항기로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 전기]

15세기 중엽부터 임진왜란까지의 시기이다. 함안 지역 출신인 조순(趙純)은 고려 말 이성계(李成桂)와 더불어 위화도 회군에 참여하였으나 임금의 명을 어긴 죄를 스스로 탓하고 사직하여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검암리로 낙향하였다. 이후 왕위에 오른 태조이성계가 불렀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태조가 하사한 오언시(五言詩)가 조순의 비명 뒷면에 명문으로 남아 있어 아마도 시문 형태로는 함안에서 가장 오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는 점필재(佔畢齋)김종직(金宗直)[1431~1492]의 영향으로 함안 지역에서도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특히 생육신의 한 사람인 어계(漁溪)조려(趙旅)[1420∼1489]는 학문과 절의로 전국적인 명성을 가질 뿐 아니라 함안에서 최초의 문집을 남겼던 문인 학자였다. 조려는 김종직의 문하에 있었으며, 수양 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려고 하자 반대하고 낙향하여 평생을 백이산 아래에서 두문불출로 은둔하여 스스로 어계 처사라 하였던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이 시기부터 함안 지역의 한문학이 유학적 전통과 함께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 전기 함안 지역에 영향을 끼친 학자 중 특히 신재(愼齋)주세붕(周世鵬)[1495~1554]을 빠뜨릴 수 없다. 그는 함안뿐 아니라 조선 전체를 통해서도 교학 분야를 앞장서 이끈 학자이자 문인이었다. 주세붕경상남도 함안군 칠서면 무릉리 사람으로 1522년 별시 문과에 급제한 이후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 서원(白雲洞書院)을 세우기도 하였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거쳐 청백리에 녹선되었고 「도동곡(道東曲)」, 「육현가(六賢歌)」, 「태평곡(太平曲)」 등 장가(長歌)와 「군자가(君子歌)」 등 단가(短歌) 8수가 전한다. 저서로는 『무릉 잡고(武陵雜稿)』 등 문집 6편을 남겼다.

[조선 후기]

임진왜란 이후부터 19세기 중엽까지 해당된다. 일찍이 임진왜란 직전에 함안 군수로 부임한 한강(寒岡)정구(鄭逑)[1543∼1620]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여헌(旅軒)장현광(張顯光)[1554∼1637]의 간접적인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함안 지역의 한학계를 주도하였다. 이 시기 활동하던 학자 중 간송(澗松)조임도(趙任道)[1585∼1664]가 대표적이다.

조임도함안군 가야읍 검암리에서 태어나 과거에는 뜻을 두지 않았고, 효성이 지극하여 백효(伯孝)라 불렸다. 그는 『간송당 문집(澗松堂文集)』 7권 4책을 저술하고, 병자호란 때 비분하여 지은 「동야유회(冬夜有懷)」를 후대에 남기기도 하였다. 조임도는 퇴계 학파와 남명 학파의 학자들과 두루 교류하면서 학문을 익혔고, 정구가 찬술했던 『함주지(咸州誌)』를 계승하여 함안의 인물과 문학을 정리한 『금라전신록(金羅傳信錄)』을 편찬하였다. 이 시기는 유학과 함께 지역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은 시기이기도 하였다.

함안 지역은 임진왜란 때 전화로 인하여 백성들의 생업이 극도로 피폐해져 강학의 공간과 체계마저 대거 훼손되었다. 광해군 이후로 남명조식의 문인들이 중앙 정계에서 정치적으로 몰락하게 되자, 그들과 학문적 연원을 깊게 가진 함안의 유학자들도 중앙 관계의 진출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임진왜란 이후 함안 지역의 유학자들은 대부분 규모가 작은 서원과 재실을 지어 선현들을 향사하고, 기본적 수양과 학문에 매진하며 전대의 명맥을 이으려는 소극적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특히 함안군 산인면 모곡리에서 출생한 죽계(竹溪)안희(安憙)[1551∼1613]는 정유재란 후인 1613년 함안군 여항면 외암리두릉 서원(杜陵書院)을 세우고 『죽계집(竹溪集)』을 집필하였다. 안희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7세에 썼다는 칠언 절구가 학자들 간에 회자되기도 하였다.

[개항기]

19세기 중엽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이다. 이 시기에 함안 지역의 학문은 1864년 성재(性齋)허전(許傳)[1797∼1886]이 김해 부사로 부임한 것을 계기로 중흥을 맞게 된다. 여러 고을 가운데 함안 지역의 유생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허전을 찾아가 문도의 주류를 이루었다. 그중에 만성(晩醒)박치복(朴致馥)[1824∼1894]은 후학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던 인물이다. 박치복은 한천재(寒泉齋) 강회(講會)를 비롯한 강학회를 통해 새로운 시대에 맞는 한문학으로의 역할을 모색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것은 이 지역뿐 아니라 일제 강제 병합 이후 민족 운동으로서도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원래 한천재는 자암(紫巖)조성원(趙性源)[1838~1891]이 독서를 하던 곳이었다. 조성원은 학문에만 전념했던 선비로 20대 젊은 시절에 허전에게 수학하였다. 50대인 1890년에 어머니의 묘를 이장하여 한천재를 신축하고, 지역 학자들과 유계(儒契)를 모아 강학에 노력하였다. 한천재 강회는 조성원의 사후 20여 년 만에 지역의 유림들에 의해 발전적으로 계승되었다. 국권 침탈 직후인 1912년에는 이 지역의 조병규(趙昺奎), 조석제(趙錫濟), 조정규(趙貞奎), 조병택(趙昺澤), 이준구(李準九), 이훈호(李熏浩) 등이 한천재에 모여 강회를 열었고, 한편으로 계속하여 후학들을 가르쳐 40여 명에 이르는 대규모의 강학회가 이루어졌다. 그들은 개인 문집을 남길 정도로 다양한 작품 활동을 하였다. 그들은 동일 제목으로 연작시를 짓거나 시적 주제를 강학하기도 하는 등 함안 지역에서 한문학의 전개를 주도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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