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200700
한자 趙任道
영어공식명칭 Jo Imdo
이칭/별칭 조기도(趙幾道)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검암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전병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85년 7월 17일연표보기 - 조임도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04년 - 조임도 향시 합격
활동 시기/일시 1634년 - 조임도 공릉 참봉 제수되었으나 사양
활동 시기/일시 1659년 - 조임도 공조 좌랑 제수되었으나 사양
활동 시기/일시 1659년 - 조임도 신산 서원 원장으로 부임
몰년 시기/일시 1664년 2월 15일연표보기 - 조임도 사망
추모 시기/일시 1666년 - 조임도 사헌부 지평 추증
추모 시기/일시 1721년 - 조임도 송정 서원에 배향
출생지 함안군 -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검암리
사당|배향지 송정 서원 - 경상남도 함안군 산인면 송정리
성격 학자
성별
본관 함안
대표 관직|경력 신산 서원 원장

[정의]

조선 후기 함안 출신의 학자.

[개설]

[가계]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치원(致遠)·덕용(德勇), 호는 간송(澗松). 어계(漁溪)조려(趙旅)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사도시 첨정(司䆃寺僉正)을 지낸 입암(立巖)조식(趙埴)이며, 어머니는 충의위(忠義衛) 유상린(柳祥麟)의 딸 문화 유씨(文化柳氏)이다. 대소헌(大笑軒)조종도(趙宗道)는 삼종형(三從兄)이다. 부인은 노파(蘆坡)이흘(李屹)의 딸 벽진 이씨(碧珍李氏)이며, 훈도 이춘길(李春吉)의 딸 안악 이씨(安岳李氏)와 재혼하였다. 아들이 없어 종형 조면도(趙勉道)의 둘째 아들 조함변(趙咸抃)을 후사로 삼았다.

[활동 사항]

조임도(趙任道)[1585~1664]는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검암리에서 출생하였다. 처음에 기도(幾道)라는 이름으로 지었는데 여헌(旅軒)장현광(張顯光)이 적극적인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고 말해 아버지가 임도(任道)로 바꾸었다. 8세 때 임진왜란을 당하여 합천으로 피난하였다. 14세 때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경상북도 청송으로 피난하였으며, 다시 영주와 봉화로 옮겨 다녔다. 봉화에 거주할 때는 월천(月川)조목(趙穆)의 제자인 반천(槃泉)김중청(金中淸)에게 배웠다. 15세 겨울에 의성으로 옮겨 갔고, 16세 때 의성에 사는 퇴계(退溪)이황(李滉)의 제자인 두곡(杜谷)고응척(高應陟)에게 『대학(大學)』을 배웠다. 17세 때는 인동으로 이거하였으며, 장현광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였다. 장현광은 조임도의 삶에서 오랫동안 지대한 영향을 끼친 스승이다.

19세 때 고향인 검암리로 돌아와 곤지재(困知齋)를 짓고 시냇가에 두 그루의 소나무를 심은 후 간송(澗松)이라고 자호하였다. 중국 송대 범질(范質)이 “동산의 화려한 꽃은 일찍 피었다가 먼저 시들고, 더디게 자라는 시냇가의 소나무는 울창한 모습으로 늦게까지 푸름을 머금고 있네."라고 표현한 시구에 근거해 호를 삼았다. 20세 때인 1604년(선조 37) 향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조임도는 관직에 나아가는 것보다 진실한 마음으로 학문을 탐구하길 원했으므로 32세에 과거 시험을 그만두고 오로지 독서에 전념하였다.

23세 때 함안의 용화산 아래로 배를 타고 온 한강(寒岡)정구(鄭逑) 및 동행한 장현광과 망우당(忘憂堂)곽재우(郭再祐)를 만났다. 이 해 이흘의 딸인 벽진 이씨와 혼인하였다. 34세 때에는 칠원현 내내(柰內)에 상봉정(翔鳳亭)을 짓고 거주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 의병장으로 추대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였다. 49세에 영산현 용산(龍山) 마을로 이거하였으며, 강 건너편 함안용화산 기슭에 합강정(合江亭)을 지어 자연 속에서 독서하고 시를 읊으며 생활하였다. 50세 때 천거를 받아 공릉 참봉(恭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이 해 신산 서원(新山書院) 원장을 맡았다. 75세 때는 공조 좌랑(工曹佐郞)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였다. 78세 때 어사 남구만(南九萬)이 조임도를 등용할 것을 아뢰자, 조정에서 특별히 쌀과 콩을 내려 주었다. 1664년 향년 80세로 별세하였다.

[학문과 저술]

조임도는 퇴계 학파의 김중청과 고응척에게 수학하였으며, 장현광을 오래도록 스승으로 섬겼다. 또한 내암(來庵)정인홍(鄭仁弘)의 문인인 이흘이 장인이며, 남명학의 영향을 깊은 받은 함안 지역에서 태어나 거의 평생을 이곳에서 생활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학문과 사상은 남명학과 퇴계학이 공존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그의 문집인 『간송집(澗松集)』에 역력히 드러나 있다. 그는 두 학파를 서로 조화시키려고 노력하였으며, 특히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큰 시련을 겪은 남명 학파의 존속을 위하여 힘을 기울였다. 교유한 인물로는 무민당(无悶堂)박인(朴絪), 한사(寒沙)강대수(姜大遂), 겸재(謙齋)하홍도(河弘度), 임곡(林谷)임진부(林眞怤), 동계(東溪)권도(權濤), 광서(匡西)박진영(朴震英), 강재(彊齋)성호정(成好正), 익암(益庵)이도보(李道輔)가 있다. 문집으로 『간송집』12권 6책이 전한다.

[묘소]

묘는 함안 아호(鵝湖)의 선영 동쪽에 있다.

[상훈과 추모]

1666년(현종 7) 사림의 건의로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추증되었으며, 1721년(경종 1) 지역 사림들이 함안군 산인면 송정리에 송정 서원(松亭書院)을 건립하고 향사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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