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201348
한자 漢詩
영어공식명칭 Chinese Poetry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함안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조선/후기,근대/개항기
집필자 정정헌

[정의]

조선 전기부터 개항기까지 경상남도 함안 지역에서 한문을 이용해 지어졌던 시.

[조선 전기의 한시]

조선 건국부터 임진왜란까지의 기간에 해당되며, 이 시기 함안 지역 한시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보다 삶의 태도가 분명한 고려의 망국지신(亡國之臣)들이 함안으로 은거함으로써 활력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이다. 그러나 새로운 왕조에서 생장한 그들의 후손들은 곧장 과거에 응하고 관계에 진출함으로써 사족들이 급성장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활동한 문인들 중 고려 말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내고 망국지신으로 함안에 은거한 조열(趙悅)의 손자인 어계(漁溪)조려(趙旅)[1420∼1489]의 「제함안향교벽상(題咸安鄕校壁上)」을 통해 이 시기 함안 한시의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아시어계은일인(我是漁溪隱逸人)[나는야 어계에 은거하는 사람이니]

기번왕래반궁빈(幾番往來泮宮濱)[몇 번이나 반궁의 물가에 다녔던고]

여금낙견청아교(如今樂見菁莪敎)[오늘날에 즐겨 보네, 인재를 가르침]

제욕여파괴불인(題浴餘波愧不仁)[그 물결에 목욕하고 불인을 부끄럽게 여기네]

[조선 후기의 한시]

임진왜란 이후에서 19세기 중엽까지로, 문집 간행은 활발하게 이루어졌지만 의외로 크게 드러나는 인물은 적은 편이다. 함안은 지리적 여건으로 임진왜란으로 인해 백성들의 생업이 극도로 피폐해졌으며, 강학의 공간과 체계마저 훼손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런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이 지역의 학자들은 임진왜란 중에 전개했던 치열한 의병 전쟁과 지역적 연대감을 승화시켜 지역 문화에 대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문학으로 표출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것은 크게 함안의 인물과 가치관을 부각시키면서 동시에 풍류를 지향하는 시(詩)로 나타났다. 여기에는 함안 군수를 역임한 한강(寒岡)정구(鄭逑)[1543∼1620]와 퇴계 학맥의 정통을 이룬 여헌(旅軒)장현광(張顯光)[1554∼1637]이 정신적 구심점으로 자리 잡았으며, 간송(澗松)조임도(趙任道)[1585∼1664] 같은 학자들의 역할이 지대하였다. 특히 조임도는 정구와 장현광의 학문을 계승하였는데, 함안의 인물 문예지라 할 수 있는 『금라전신록(金羅傳信錄)』을 편찬하였다. 또한, 「삼강구절구(三綱九絶句)」, 「동현십육영(東賢十六詠)」 등의 연작시를 창작하기도 하였다.

다음은 임진왜란 이후 함안의 대표적인 학자인 조임도의 「삼강구절구」 중에서 효(孝)에 대한 세 번째 작품을 소개한다.

통친비명포애상(痛親非命泡哀傷)[비명에 부친 여읜 슬픔을 안고서]

폐문종신불천향(閉門終身不踐鄕)[한평생 눈을 닫고 마을길도 안 밟았네]

추양매사여재경(追養每思如在敬)[제사 봉양할 때마다 계신 듯이 공경하네]

상공심사가첨상(想公心事可沾裳)[공의 심사 생각하니 옷깃을 적시누나]

이 시는 처사 이전(李琠)을 읊은 시이다. 그는 부친이 감옥에서 비명으로 죽자 통한으로 여겨 고을 북쪽의 대산리에 있는 무덤 아래 은거하면서 의로움을 행하였다. 그곳에서 자제들을 가르치면서 평생토록 발길이 성문에 미치지 않았다고 한다.

[개항기의 한시]

19세기 중엽 이후 20세기 초기 함안의 대표적 한문학 사업으로 한천재(寒泉齋) 강회(講會)와 시문학 창작을 들 수 있다. 이것은 이 지역뿐 아니라 강제 병합 이후의 민족 운동으로서도 큰 의미를 지닌다. 한천재는 원래 자암(紫巖)조성원(趙性源)[1838~1891]이 독서하던 곳이었다. 조성원은 향리에서 학문에 전념했던 선비로 20대에 성재(性齋)허전(許傳)[1797∼1886]에게 수학하였으며, 50대인 1890년에 한천재를 짓고 지역 학자들과 유계(儒契)를 모아 강학에 노력하였다. 그의 사후 20여 년 만에 지역 사람들에 의해 한천재 강회는 발전적으로 계승되었다.

한 일 병합 직후인 1912년에는 세칭 한천육로(寒泉六老)인 일산(一山)조병규(趙昺奎), 금계(錦溪)조석제(趙錫濟), 신암(信庵)이준구(李準九), 서천(西川)조정규(趙貞奎), 일헌(一軒)조병택(趙昺澤), 우산(芋山)이훈호(李熏浩)가 한천재에서 강회를 하였고, 한편으로는 지속적으로 후학을 가르쳐 회원이 40여 명에 이르는 대규모 강회가 이루어졌다. 이들은 개인 문집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동일 제목으로 연작시를 쓰기도 하고 시적 주제를 강화하기도 하여 하나의 문학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 시는 영사(詠史), 교유(交遊), 교훈(敎訓)을 주제로 삼으면서 일제 강점기 초기에 문학의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였다. 다음은 한천육로 중 가장 원로인 조병규의 '벗들을 기다리는 내용'인 「대우인(待友人)」이다.

자양심처유진인(紫陽深處有眞人)[자양산 깊은 곳에 진인이 있으니]

결사참동숙약인(結社參同宿約因)[뜻을 모아 함께하기 오랜 약속 두었네]

뇌수청풍선아로(雷首淸風先我路)[뇌수산 맑은 바람 내 앞길 이끄는데]

두릉명월여수린(杜陵明月與誰隣)[두릉산 밝은 달은 누구와 이웃할까]

경전제갈비망한(耕田諸葛非忘漢)[밭을 갈던 제갈량은 한을 잊지 않았고]

저도담권역은진(著道聃倦亦隱秦)[도를 지킨 노자 또한 진나라에 숨었네]

임외소거하태만(林外小車何太晩)[저 산 밖 작은 수레 어찌 이리 늦을까]

조우암상모계빈(朝于巖上暮溪濱)[아침엔 바위 위로, 저녁엔 시냇가로]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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