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301086 |
---|---|
한자 | 河漢瑞 |
영어음역 | Ha Hanseo |
이칭/별칭 | 수영(水永),한소(漢紹),한서(漢西)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북도 제천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구완회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
---|---|
몰년 시기/일시 | 1908년 |
활동 시기/일시 | 1908년 |
추모 시기/일시 | 1991년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이강년 의진 선봉장 |
[정의]
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이강년 의진의 의병장.
[가계]
본관은 진주. 자는 수영(水永).
[활동 사항]
하한서(河漢瑞)[?~1908]는 단양 출신이다. 1907년(순종 1) 군대 해산 이후 이강년(李康秊)이 다시 의병을 일으킬 때 참가하여 좌선봉이 된 이래 크고 작은 전투에서 많은 활약을 하였다. 갈평 전투와 영월 전투 등에서 공을 세웠으나, 싸리재 전투에서 휘하 병력을 거느리고 제때에 당도하지 못하여 질책을 받았다. 이를 불만스럽게 여긴 하한서는 주광식(朱光植)의 후군 부대를 도우라는 지시를 거부하여 군법에 따라 처형될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러 장수들이 사정하고 또한 이강년이 갖고 있던 고종의 밀조를 꺼내 들고 주변을 설복시켜 위기를 모면하였다.
그 후 죽령 전투에서 큰 활약을 하였으며, 한동안은 떨어져 나와 병력을 모으는 데만 힘썼다. 이후 이강년이 이끌던 본진이 복상골 전투에서 대패하고 북쪽으로 이동할 때 다시 만나 도선봉(都先鋒)으로서 참여하였다. 가평 부근에 주둔하면서 치러진 용소동 전투에 참전하였고, 남하한 후 경상북도 북부 지역에서 전개된 여러 전투에서도 용맹을 떨쳤다. 1908년(순종 2) 7월 청풍 작성 전투에서 이강년이 체포될 때 부하 장졸 7명과 함께 전사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