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3009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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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熙直 |
영어음역 | Yi Huijik |
이칭/별칭 | 경현(景賢),덕헌(悳軒)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제천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구완회 |
출생 시기/일시 | 186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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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06년 |
활동 시기/일시 | 1908년 |
몰년 시기/일시 | 1922년 |
비 | 충청북도 제천시 백운면 평동리 |
성격 | 교육 운동가 |
성별 | 남 |
본관 | 전주(全州) |
대표 경력 | 제천청년회 초대 회장 |
[정의]
개항기 제천 출신의 교육 운동가.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현(景賢), 호는 덕헌(悳軒). 아버지는 이교채이다.
[활동 사항]
이희직(李熙直)[1866~1922]은 의관(議官)을 역임하였다. 천성이 강직하고 인덕을 겸하여 물려받은 재산을 기울여 사회사업에 힘썼다. 신교육을 통하여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여겨 1906년 여름부터 계몽 운동가들이 활발히 전개한 여러 학회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서북학회와 기호학회에 각각 논 75두락을 기부하고, 호남학회·교남학회·관동학회·경성고아원에 논 15두락씩을 기부하여 교육 및 사회사업에 보태도록 하였고, 중앙학교·양정학교·휘문학교 등 10여 개 학교가 그에게 크게 도움을 받았다.
그 밖에도 기독청년회·여자교육회 등 여러 기관에 재산을 출연하였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경향(京鄕)에서 학회 운동이나 사립학교 설립에 재산을 출연하는 운동의 계기가 되었는데, 지역 사회에 설립된 부명학교·흥명학교도 그 좋은 예이다. 군대 해산 이후인 1908년 초에는 김필현과 함께 건축 회사를 만들어 의병이 봉기하였을 때에 일본군이 불태운 제천 시가지를 복구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1920년대 제천에서 사회 운동을 주도한 제천청년회의 초대 회장을 역임하였다.
[상훈과 추모]
1940년 6월 김창숙(金昌淑)이 짓고 김성수, 현상윤, 여운형, 홍명희 등 여러 명사가 동참한 행적비가 제천시 백운면 평동리에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