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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300765
한자 姜暹
영어음역 Gang Seom
이칭/별칭 명중(明仲),송월당(松月堂),송일(松日),낙봉(樂峰)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북도 제천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정제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16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546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550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562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566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568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573년연표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진주(晉州)
대표 관직 한성부 판윤

[정의]

청풍 군수를 지낸 조선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명중(明仲), 호는 송월당(松月堂)·송일(松日)·낙봉(樂峰)이다. 할아버지는 사간원 대사간 강경서(姜景敍)[1443~1510]이며, 아버지는 강공망(姜公望)이다. 형은 강욱(姜昱)이다.

[활동 사항]

강섬(姜暹)[1516~?]은 1546년(명종 1)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예문관 봉교가 되었다. 그 후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으로 『중종실록(中宗實錄)』과 『인종실록(仁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1550년(명종 5) 예조 좌랑이 되었고, 사간원 정언·홍문관 수찬·함경도 어사·사간원 헌납·홍문관 부교리를 역임하였다. 이후 외직으로 만포 첨사(滿浦僉使)를 역임하였고 다시 중앙으로 돌아와 병조 참지에 임명되었다.

명나라에 성절사(誠節使)로 파견되었고, 돌아온 후 첨지중추부사와 승정원 도승지를 역임하였고, 1562년(명종 17)에는 회령 부사로 부임하였다. 다음해 순회세자(順懷世子)의 상(喪) 때 행부호군(行副護軍)으로 임명되어 국장도감(國葬都監)의 주상(主喪)으로서 3년간 수묘관(守墓官)의 역할을 하였다.

1566년(명종 21) 한성부 판윤에 임명되었다. 이후 판윤 재직 때 성황제(城隍祭) 헌관(獻官)임에도 병을 핑계로 제사에 불참하였다는 이유로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서 동지중추부사로 전임되었다가 전라도 관찰사로 전보되었다.

1568년(선조 1) 또 한 차례 성절사로 임명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573년(선조 6)에 다시 한성부 판윤에 임명되어 특진관으로 경연에 참석하기도 했다. 신병으로 판윤에서 물러나 경기 관찰사로 체직되었다.

청풍 군수로 재직하였으며, 재직 당시 선정을 베풀어 후에 선정비가 세워졌다. 1583년(선조 16) 비변사에서 재경원수(在京元帥)로 추천하였고, 죄인 사면 때에 외류(外流) 이하는 납속(納粟)으로 속죄시킬 것을 주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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