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300745 |
---|---|
한자 | 豪族 |
영어음역 | Hojok |
영어의미역 | Local Gentry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제천시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고려/고려 전기 |
집필자 | 정제규 |
[정의]
통일 신라 후기부터 고려 전기까지 충청북도 제천 지역에서 독립된 세력을 형성하여 지배권을 행사하던 세력
[개설]
호족(豪族)이라는 용어의 개념은 사전적으로는 뛰어나고 우수한 친족 집단을 말하며, 역사적으로는 특정한 시기에 중앙의 귀족과 대비되는 지방의 토착 세력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한국사에서 호족은 신라 하대에 중앙 귀족들의 정권 다툼으로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됨에 따라 지방에서 새로 대두된 세력으로서, 다음의 몇 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
첫째, 중앙 귀족들과의 정권 다툼에서 패배하여 지방으로 내려가 정착한 경우, 둘째, 지방의 토착 세력이던 촌주(村主)들이 성장한 경우, 셋째, 청해진의 장보고(張保皐)로 대표되는 해상 세력의 경우, 넷째, 초적(草賊)이나 군도(群盜) 세력의 경우 등이 있다. 고려는 창업 초기 왕조의 창건에 공이 큰 세력에게 출신지 군현의 대표적인 토성으로서 거주 지역에 대한 지배력과 공신으로서의 위상을 인정해 주었다.
[제천 지역 토착 세력]
제천 지역에서 활동했던 호족을 살펴볼 수 있는 직접적인 자료는 전하지 않는다. 다만, 고려 전기에 조성된 「흥녕사징효대사보인탑비(興寧寺澄曉大師寶印塔碑)」에 기록된 단월(檀越)들의 명단 속에서 ‘평직(平直) 촌주(村主)’와 ‘귀평(貴平) 일길찬(一吉湌)’ 등 촌주 출신 호족 세력으로 보이는 이들이 확인되어 그 일면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촌주(村主)와 일길찬(一吉湌)은 제천 지역에서 활동했던 토착 세력의 성격을 보여 준다. 촌주는 신라 시대 지방민을 효율적으로 다스리려고 지방의 유력자에게 준 지방 행정 조직의 말단 관직에 해당한다. 또한 일길찬은 경위(京位) 17관등 가운데 하나로서 6두품(六頭品)의 신분층이 맡을 수 있었던 관위이다. 따라서 이들은 성주나 장군과 같이 큰 주(州)·현(縣)에서 활동했던 대호족과 비교되는 존재로서, 대호족의 휘하에 들어가 토착 세력을 중심으로 활약하였을 것이다.
이 같은 호족 세력은 940년(태조 23)에 이루어진 군현 제도의 정비 과정 이후에 점차 중앙의 통제 속에 들어갔던 것으로 이해된다. 고려 건국 이후 왕조의 창건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호족 세력은 출신지 군현에서 토성으로 인정받게 되었고, 공신(功臣)으로서의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태조(太祖)는 940년 10월에 신흥사(神興寺)를 중수하여 공신당(功臣堂)을 세우고 벽에 공신들의 초상을 그려 붙였는데, 이때 3,200명에 달하는 공신의 등급 책정과 함께 전국 군현에 토성이 분정되었다는 사실은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이다.
이 같은 고려 전기의 호족들이 후일 고려 후기와 조선 시대까지 이어지는 지역의 토성 세력으로 존재하였을 것이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기록된 청풍군의 토성인 유(劉)·김(金)과 현재는 없어졌다는 장(莊), 한편 제천현의 토성인 안(安)·지(智)·석(石)·강(姜)과 후에 사라진 나(那) 등은 제천 지역의 주요 세력을 엿볼 수 있는 간접 자료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