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3006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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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西倉里西倉址 |
영어음역 | Seochang-ri Seochangteo |
영어의미역 | West Warehouse in Seochang-ri |
이칭/별칭 | 서창리 곳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서창리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류금열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8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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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서창리 |
성격 | 창고 터 |
[정의]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서창리에 있는 조선 시대의 창고 터.
[변천]
조선 시대 청풍군에 있었던 관창(官倉) 중 하나인 서창은 『여지도서(輿地圖書)』, 『청풍부읍지(淸風府邑誌)』, 「청풍부팔면지도」에서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서창은 청풍에서 충주로 통하는 지름길에 있었으며, 조선 시대에 죽령대로와 연계한 관로였다. 특히 서창은 강변에 위치하여 한강으로 수운한 세곡을 보관하는 동시에 상인을 대상으로 한 원집이 성시를 이루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청풍군이 제천군으로 통폐합되고 육상 교통로가 발전하면서 청풍은 구읍으로 전락하였고, 이와 더불어 서창의 기능도 약화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따라 창고 건물은 일제 강점기에 후학당(後學堂) 건립 용도로 해체되어 재사용되었고, 부지는 밭으로 사용되었다.
1950년 6·25 전쟁 때 제천시 한수면 서창리 벌판에 있었던 곳집은 소실로 인하여 밭으로 전환되었다고 하는데, 이 곳집은 곡식을 보관한 창고로 전승한다. 또한 제천시 한수면 서창리에는 ‘소금묻이산’이 있는데, 이 산에 매일 수만 관의 소금을 쌓았다가 경상도 일대에 등짐과 우마로 공급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이러한 전승들은 과거 교통의 요지에 위치한 중요한 창고였던 서창의 위상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서창이 관창으로서의 위상이 퇴색된 이후에도 이곳에서는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졌고, 그에 따라 역원 및 주점이 번성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도 100여 호 이상이 거주하면서 융성했으나 수운 문화의 쇠퇴와 더불어 충주댐 수몰로 서창의 영화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위치]
『여지도서』에 “서창은 고을의 치소에서 서쪽으로 경심령을 넘어 25리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청풍부읍지』에 “서창은 원서면에 있으며 서쪽으로 거리는 20리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거리상 차이가 있으나 동일한 장소로 여겨지며, 충주댐 수몰 전에 제천시 한수면 서창리 412번지 일대로 추정된다. 이곳은 서창초등학교에서 서쪽 강변 쪽으로 국도 36호선을 건너 약 30m 지점, 학교 소유의 밭에 해당하였다. 서창은 강변에 하역이 용이한 곳에 위치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충주댐 수몰로 충북대학교 박물관 서창리 서창지 발굴 조사단은 1982년 8월 14일~9월 17일까지 시굴 조사하였다. 조사단은 땅에 묻힌 창고의 주춧돌을 확인하였다. 또한 현지 주민 탐문 조사에서 일제 강점기에 후학당으로 사용한 건물을 확인하였고, 제반 문헌 조사를 마친 다음 서창리 서창 터를 발굴, 조사한 결과 세 차례에 걸쳐 재건축되면서 창고의 초석과 목재를 이용하여 후학당을 건축한 사실을 확인했다.
발굴 당시 서창이 위치한 곳은 청풍강 주변을 가로지르는 지방도 597호선과 단양으로 통하는 국도 36호선의 분기점으로 도로망이 발전되면서 본래의 모습을 잃었고, 대홍수로 인하여 퇴적층이 쌓이면서 전반적으로 교란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창고의 구조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도자기편과 와편이 출토되어 기와를 얹은 건물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현황]
현재 서창리 서창 터는 충주댐으로 인해 수몰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서창이 유명한 것은 소금배를 하역하여 경상도 일원에 공급했기 때문이며, 주병원(酒餠院) 일대는 상인의 발길이 분주했던 곳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