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3005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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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鷄山里古墳 |
영어음역 | Gyesan-ri Gobun |
영어의미역 | Ancient Tomb in Gyesan-ri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고분 |
지역 | 충청북도 제천시 청풍면 계산리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강민식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8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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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충청북도 제천시 청풍면 계산리 |
성격 | 고분 |
양식 | 적석무덤[즙석봉토분] |
크기(높이, 지름) | 1.5~2m[높이]|7m[지름] |
소유자 | 국유[수몰 지구] |
관리자 | 국유[수몰 지구] |
[정의]
충청북도 제천시 청풍면 계산리에 있던 삼국 시대의 고분.
[위치]
계산리 고분은 한수면 소재지에서 청풍문화재단지로 향하는 지방도 597호선을 따라 가다가 청풍초중학교 방향으로 직진하여 제천시 청풍면 신리(新里) 방면으로 들어서면 연곡리와 광의리를 지나 접근할 수 있다. 비봉산[531m]의 북서쪽 하안에 해당하나 현재 수몰되어 흔적을 확인할 수 없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1979년~1980년 충주댐 수몰 지구 문화 유적에 대한 지표 조사에서 확인된 유적으로, 경희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1982년 7월 17일~8월 1일에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조사에 앞서 분구 상에는 민묘가 조성된 후 이장된 적이 있고, 여러 차례 홍수 피해를 입은 흔적이 있었다. 조사 당시 봉분은 거의 유실된 상태로 원형의 호석 일부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발굴 조사를 통해 봉분 내 3기의 적석 무덤이 순서대로 조성되었음이 확인되었지만, 무덤방의 형태를 정확히 확인할 수 없었다. 내부에서 망치돌 1점과 무문 토기편과 삼국 시대 토기편이 일부 수습되었다.
[형태]
발굴 조사 이전 고분은 충적 대지 상에 약 2m 가량의 높이로 남아 있었는데, 유실된 고분의 중심부는 높이 1.5m, 직경 7m 가량의 원형이었다. 분구를 4분하여 조사를 진행한 결과 내부에서 3기의 독립된 적석 무덤이 확인되었는데 조성 시기별로 1~3호로 구분하였다.
계산리 고분(1)은 후대에 계산리 고분(2)를 조성하면서 크게 파괴되었는데, 제일 큰 규모이며 길이 30~50㎝ 크기의 하천석으로 직경 9.3m의 호석렬[둘레돌]을 두르고 있고, 내부에 하천석으로 무덤방을 조성한 형태였다. 내부에는 하천에 의해 형성된 2m 두께의 자갈 모래층 위에 10㎝ 정도의 부식토가 깔려 있으며, 그 위에 적석 무덤을 조영하였다. 무덤은 높이 50㎝ 정도의 둥근 돌무더기 내에 강돌을 한 층 깔고 흑갈색 점토를 깐 뒤 조성하였다.
계산리 고분(2)는 계산리 고분(1)의 4/1 정도를 파괴하여 조성하였으며, 길이 30㎝ 내외의 하천석으로 직경 6m 크기의 호석렬[둘레돌]을 조성하였다. 그 내부에 네모꼴 형태의 3×2m 크기의 구획을 설정한 후 하천석과 산 돌을 채워 넣은 형식이었다. 하천석뿐만 아니라 산 돌을 이용하여 네모꼴의 구획을 설정한 것은 북한강 유역의 문호리 유적에서도 확인된 고구려 계통의 형식이다. 단면의 양상은 계산리 고분(1)과 같다.
계산리 고분(3)은 제일 나중에 조성된 것으로, 계산리 고분(2)를 훼손하지 않고 같은 양상으로 축조하였다. 직경 6.6m 크기의 둘레돌을 쌓은 후 내부에 하천석과 산 돌을 채워넣은 형태로 내부 중앙에 네모꼴 묘곽을 설치하였다.
[출토 유물]
계산리 고분(1)에서는 무문토기편 66점과 삼국 시대 토기편 38점, 용도 불명의 철편 2점이 수습되었고, 계산리 고분(2)에서는 고구려 계통의 회백색 토기편이, 계산리 고분(3)에서는 삼국 시대 토기편과 조선 시대의 유물이 일부 수습되었다. 둘레돌의 쐐기돌로 이용한 망치돌도 수습되었는데, 길이 16.8cm, 너비 8.1cm, 두께 4.6㎝ 크기로 화강암제 하천석의 중앙 부분을 양쪽에서 떼어낸 형태이다.
[현황]
현재 수몰되어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의의와 평가]
계산리 고분은 삼국 시대 초기의 문화상을 보여주는 유적으로 충적 대지 위에 강돌과 산 돌을 이용하여 축조한 적석 무덤이다. 분구 내의 계산리 고분(2)와 계산리 고분(3)의 묘곽 형태는 북한강 유역의 문호리 적석총에서 확인된 것과 같은 것으로, 출토된 고구려의 회백색 토기편과 함께 고구려와 같은 북방 계통의 문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