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200516
한자 記錄 遺産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함안군
집필자 이상필

[정의]

경상남도 함안군에 전해지는 문자로 기록해 놓은 문집 등의 기록물.

[개설]

함안 지역 사람들이 남긴 기록 유산으로는 문집류, 책판류, 금석문 등이 있다. 문집이나 실기류는 대부분 개인이나 문중이 소장하고 있는 자료들로 그 가운데는 일부 책판이 전해 오는 것들도 있다. 그 외 금석문으로는 개인 묘소의 묘비(墓碑)와 신도비(神道碑) 등이 있으며, 공신 교서 1점이 있다.

[문집류]

2016년 현재 함안군 일원에 소장하고 있는 고서는 수천 종에 이르고, 함안 사람들의 문집이나 실기류만 해도 수백 종에 이른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것 세 종류만 살펴보기로 한다.

『무릉 잡고(武陵雜稿)』는 조선 전기의 학자 주세붕(周世鵬)[1495~1554]의 시문집이다. 20권 10책이며, 1581년에 초간되었고 1859년에 중간되었다. 이황(李滉)은 초간본 발문에서 주세붕의 시문을 평하여 “기이하고 웅장하여 마치 용이나 뱀을 붙잡는 듯, 호랑이나 표범을 때려잡는 듯 짐작할 수 없으니 실로 내가 미치지 못할 바이다.”라고 하였다. 특히, 『무릉 잡고』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한글 가사인데, 「도동곡(道東曲)」·「육현가(六賢歌)」·「엄연곡(儼然曲)」·「태평곡(太平曲)」 등이 모두 경기체가 형식으로 쓰였으므로, 당시의 가곡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간송집(澗松集)』은 조선 중기의 학자 조임도(趙任道)[1585~1664]의 시문집이다. 조임도는 21세 때 『관규 쇄록(管窺鎖錄)』을 저술하였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거상 대절(居喪大節)」 10조(條)를 써서 자손들이 교훈으로 삼도록 하였으며, 또 아버지의 언행록인 『추모록(追慕錄)』을 지었다. 1638년 『취정록(就正錄)』을 쓰고 그 이듬해에는 『금라전신록(金羅傳信錄)』을 편찬하였다. 『간송집』은 1744년에 이광정(李光庭)의 편집을 거쳐 그 현손 조홍엽(趙弘燁)에 의해 7권 4책의 목판본으로 간행되었다. 「사사속소(謝賜粟疏)」는 1662년(현종 3) 임금으로부터 곡식을 받은 데 대한 사례와 아울러 엄궁금(嚴宮禁)·친유신(親儒臣)·흥교학(興敎學)·수무비(修武備) 등 시무 14조, 명분·기강·사치 등 시폐 4조를 열거하고, 시행책과 개혁책을 촉구한 상소문이다. 잡저 중 「우언(寓言)」에서는 난세를 당했을 때 선비의 출처 문제를 논하였다. 「잡설(雜說)」은 현자라고 해서 반드시 명성을 남기는 것이 아님을 밝힌 글로 자신을 비유한 것이다. 「저익설(沮溺說)」에서는 옛날 은자 장저(長沮)와 걸닉(桀溺)의 고사를 예로 들어 처세하는 방법을 문답식으로 설파하고 있다. 「기이(記異)」에서는 불교의 허탄함을 변론하여 반박하였고, 「관규 쇄설(管窺瑣說)」에는 존성(存誠)·거경(居敬)·궁리(窮理) 등 학문하는 방법과 붕당에 관한 논리 등 참고가 되는 기사가 많다. 「봉선초의(奉先抄儀)」에는 제례 의식으로 시제(時祭)·기제(忌祭)·묘제(墓祭) 등 10개 조항의 의식을 간결하고 명확하게 제시하였다.

『만성집(晩醒集)』은 조선 후기의 학자 박치복(朴致馥)[1824~1894]의 시문집이다. 1896년에 허유(許愈)·김진호(金鎭祜) 등에 의해 13권 분량의 목활자본으로 초간되었고, 1925년 합천 삼가에서 18권 9책의 목판본으로 중간되었다. 16권 8책은 본문이고 마지막 2권 1책이 부록이다. 이 가운데 「대동 속악부(大東續樂府)」는 조선의 건국을 노래한 사해가(徙海歌)로 시작하여 숙종 대 대명사대(大明事大)의 표징물인 대보단(大報壇)으로 끝나고 있는데, 각 편마다 서두에 해설을 달았다. 책 중에는 1862년 임술민란이 진정된 뒤 농민 봉기의 원인으로 파악된 삼정을 바로잡는 방안을 정리하여 낸 「응지대삼 정책(應旨對三政策)」이 있으며, 성리학에 입각한 서양 세력을 물리치기 위한 방책에 대하여 논한 「척양사론(斥洋邪論)」이 있다.

[책판류]

함안 지역은 수많은 학자와 문사를 배출하여 그들의 저술을 간행한 책판 또한 많았다. 그러나 1800년대 이전의 책판은 보이지 않고 1800년 이후에 간행된 책판이 대부분이다. 그중 대표적인 것을 들면 다음과 같다.

『간송집』 책판 및 『금라전신록(金纙傳信錄)』 책판은 경상남도 유형 문화재 제180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책판은 조선인조 때의 학자 조임도의 문집인 『간송집』『금라전신록』을 간행하기 위한 책판이다. 『간송집』 책판은 1744년(영조 20)에 제작된 것이며, 『금라전신록』은 함안의 역사와 여말 충신 이방실(李芳實) 장군을 비롯한 함안 출신들의 업적을 기록한 것으로 1813년(순조 13)에 제작된 것이다. 책판의 크기는 가로 21.5㎝, 세로 44.5㎝이며, 총 190매가 전해오고 있다.

『국담 문집(菊潭文集)』 책판은 경상남도 유형 문화재 제242호로 지정되어 있다. 주재성(周宰成)의 글을 모아 1908년 후손이 제작한 책판이다. 주재성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의병장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1728년 정희량의 난이 터지자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웠다. 그 후 고향에 돌아와 학문 연구와 후진을 기르는 데 노력하였다. 주재성이 죽은 후 1788년 기양 서원에 그의 위패가 모셔졌다. 이 책판은 『국담 문집』 원집 2권과 부록 2권을 나무로 양각한 것으로 총 56매이며, 크기는 가로 21.3㎝, 세로 34.1㎝이다.

『근재집(謹齋集)』 책판은 경상남도 유형 문화재 제174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려 말기의 문인 근재안축(安軸)[1282∼1348]의 문집을 간행하기 위해 제작된 것이다. 『근재집』은 일찍이 제주도에서 간행되어 나주로 옮겨 보존되었으나, 오랜 세월이 흘러 없어져 버렸다. 『근재집』 책판이 판각되기 이전에 안축의 사위인 정양생(鄭良生)이 1365년(공민왕 14)에 안축이 지은 『관동 와주집(關東瓦注集)』을 청주에서 간행한 것을 비롯하여 안축의 손자 안숭선이 미처 수록되지 못한 유고를 편집, 정리하여 1445년(세종 27)에 목판본으로 간행한 것이 있다. 『근재집』 책판은 1910년 안유상(安有商)·안풍상(安風商) 형제가 세고(世稿)를 제외한 부록을 증보하는 한편, 저자의 동생인 안보(安輔)의 시문 및 관계 기록을 모은 『문경공 일고(文敬公逸稿)』를 첨록하여 함안에서 판각한 것이다. 현재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신음리순흥 안씨 문중에 소장되어 있다.

『무릉 잡고』 책판은 경상남도 유형 문화재 제173호로 지정되어 있다. 주세붕과 아들 주박(周博), 손자 주맹헌의 시문을 판각한 것으로 모두 352매가 보존되어 있다. 『무릉 잡고』주세붕의 초고를 아들 주박이 모아서 이황의 교정과 편집을 거쳐 1564년(명종 19) 영덕에서 7권으로 초간하였다. 그 후 초간 시 빠진 것을 모아 1581년(선조 14)에 8권으로 중간하고 다시 후손 주상현(周相炫), 주병항(周秉恒) 등이 중간본과 전사본을 바탕으로 재편하여 1851년(철종 10)에 덕연 서원에서 삼간하였다. 3차 간행시 미간된 『죽계지』 3권, 연보 비명을 합한 1책을 1908년에 주시재, 주시범 등이 간행한 것이 사간(四刊)이다. 이렇게 하여 비로소 주세붕의 사후 354년 만에 완간되니 원집 8권, 별집 8권, 부록 4권의 총 20권 11책이다.

[금석문]

함안 지역은 수많은 사대부 가문이 있어서 묘소에 남은 금석문은 이루 언급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문화재로 지정된 비석만 소개한다.

오졸재 박한주 신도비는 경상남도 유형 문화재 제261호로 지정되어 있다. 박한주의 묘소 인근에 세워둔 신도비로, 1629년에 세워진 것이다. 간송조임도가 비문을 지었다. 조순 장군비(趙純將軍碑)는 함안천 동쪽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으며, 고려 말 조선 초의 조순 장군의 지조를 기리고 있다. 조순[?~1398]은 고려우왕의 총애를 받으며 여러 관직을 맡아보면서 나랏일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요동을 정벌할 때 위화도에 이르러 이성계(李成桂)가 회군하려 하자, 이를 적극 반대하며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나오지 않았다. 이성계가 왕위에 오른 후 조순을 여러 번 불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고 조순이 죽은 후 왕이 조순의 집 앞에 비를 세우도록 하여, 누구든 이 비를 지나갈 때에는 말에서 내릴 것을 명하였다.

[기타]

그 밖의 기록물로는 공신 교서 1점이 전해 온다.

「도천재(道川齋) 단서 죽백(丹書竹帛)」은 경상남도 유형 문화재 제56호로 지정되어 있다. 1625년(인조 3)에 이괄(李适)의 난(亂)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운 이휴복(李休復)[1568∼1624]에게 진무공신(振武功臣) 3등에 책록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는 공신 교서다. 크기는 가로 198㎝, 세로 38㎝의 두루마리로 되어 있다. 이휴복은 임진왜란 때 곽재우와 함꼐 의병을 일으켰고, 1606년(선조 39) 무과에 급제하여 절충 장군, 순천 군수 등의 벼슬을 지냈다.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관군 별장으로 안현에서 공을 세웠다. 공신에 오른 후 인원군에 봉해졌으며, 순천 부사로 부임해 그곳에서 죽었다. 이 교서는 해서체(楷書體)로 첫머리에 "교(敎) 갈성분위진무공신가선대부항순천군수인원군이휴복서(竭誠奮威振武功臣嘉善大夫行順天郡守仁原君李休復書)"라 썼고 공신으로 책록된 사연과 하사(下賜)된 노비(奴婢) 등을 기재하였으며, 끝에는 공신 1등 3명, 2등 9명, 3등 20명 전원의 이름이 있고 사급 연월일(賜給年月日)인 천계 오년(天啓五年) 사월(四月) 일(日) 위에 ‘시명지보(施命之寶)’의 도장이 찍혀 있다. 뒷면에 "강석기(姜碩期) 제(製) 이무림(李茂林) 서(書)"라 쓰여 있어 교서의 제작과 글씨를 쓴 사람이 명기(明記)되어 있다.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