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읍지의 본보기, 『함주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201367
한자 朝鮮 邑誌- 咸州誌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함안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광철

[정의]

1587년에 편찬된 현존 최고의 함안 읍지.

[개설]

『함주지(咸州誌)』는 현존하는 수많은 읍지 가운데 가장 오래된 최고의 읍지이다. 함안 군수 한강(寒岡)정구(鄭逑)와 함안의 재지 사족들이 함께 편찬한 『함주지』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체제를 계승 발전시켜, 보다 풍부한 지역 정보를 수록하고 있다. 16세기 이후 편찬된 읍지들은 거의 『함주지』의 체제를 따를 정도로 읍지 편찬의 모범이 되었다.

[조선의 읍지들]

읍지는 지방 행정 단위인 부(府)·목(牧)·군(郡)·현(縣)을 단위로 하여 지역에서 편찬한 지리서이다. 지역 정보를 체계적으로 수록한 지리서는 전국 지리서인 여지(輿志)와 지방 지리서인 읍지(邑誌)로 나뉜다. 여지는 전국의 모든 지역을 수록하고 있어 주요 내용만 기록되어 있는 반면, 읍지는 지방을 단위로 하여 편찬되므로 상세한 내용을 수록하고 있다. 읍지는 다시 서술 대상 지역의 규모에 따라 도지(道誌)·군현지(郡縣誌)·촌동면지(村洞面誌)·진영지(鎭營誌)·변방지(邊防誌) 등으로 구분된다.

조선 전기의 관찬(官撰) 지리서 편찬과는 달리 16세기 이후에는 지방의 관리, 학자들이 중심이 된 읍지가 광범위하게 편찬되기 시작하였다. 중앙 정부가 지방 사정을 파악하는 자료로 이용하였던 조선 전기 관찬의 통지(通志)와는 달리, 지방 통치를 위한 자료의 획득이라는 목적과 더불어 유교적인 향촌 교화의 측면이 강조되었다. 조선에서 편찬된 최초의 사찬(私撰) 읍지는 이자(李耔)가 1507년에 편찬한 경상도 의성(義城)의 『문소지(聞韶志)』로 알려져 있지만,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읍지는 정구가 1587년에 편찬한 『함주지』이다. 『함주지』 편찬 이후 16∼17세기에 경상도와 전라도를 중심으로 활발한 읍지 편찬이 이루어졌으며, 이후 전국으로 확대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16~17세기에 편찬된 읍지는 사찬 읍지가 대부분을 차지하며, 18세기 이후는 관찬 읍지가 우세한 편인데, 영조 대에 완성된 『여지도서(輿地圖書)』는 종합적 성격을 지닌 전국 지리서로서 특징을 지닌다.

[함주지를 만든 사람들]

『함주지』를 만든 사람은 정구로 잘 알려져 있다. 1587년(선조 20) 당시 함안 군수로 재직하고 있던 정구는 이때 『함주지』를 편찬하기에 앞서 1580년에 창녕의 『창산지(昌山誌)』를 편찬하였고, 1584년 동복 현감(同福縣監)으로 재직하면서 『동복지(同福志)』를 편찬하였다.

정구[1543∼1620]의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으로, 성주(星州)에 거주하였다. 철산 군수 정윤증(鄭胤曾)의 종손으로, 할아버지는 사헌부 감찰 정응상(鄭應祥)이고, 아버지는 김굉필(金宏弼)의 외증손인 충좌위(忠佐衛) 부사맹(副司孟) 정사중(鄭思中)이며, 어머니는 이환(李煥)의 딸인 성주 이씨(星州李氏)이다.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남명(南冥)조식(曺植)을 스승으로 삼았으며, 1563년 향시(鄕試)에 합격했으나 이후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장현광(張顯光)이 쓴 정구의 행장에 따르면, 정구는 1587년 함안 군수로 부임하기 이전까지 정부로부터 중앙과 지방 관직에 여러 차례 임명받았으나 대부분 사양하거나 조기 퇴임하였다. 함안 군수로 부임하기 이전까지 정구가 역임했던 관직은 창녕 현감(昌寧縣監)[1580], 지평(持平)[1581], 동복 현감(同福縣監)[1584], 교정청 낭청(校正廳郎廳)[1585] 정도였다. 이 외의 기간은 학문 연구 및 문도들과 함께 강학(講學)하며 지냈다.

『함주지』 편찬은 정구가 주도하였지만, 함안 재지 사족과의 협력을 통해서 완성할 수 있었다. 『함주지』 서문에서 정구는 편찬에 참여한 오운(吳澐), 이칭(李偁), 박제인(朴齊仁), 이정(李瀞) 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이칭은 관대하고 온후한 군자이고, 박제인은 덕을 지닌 데다 지조가 있고, 이정은 재주와 행실이 다 높아 이들 모두 내가 경외하여 항상 만나고 서로 즐겁게 지내는 자들이다. 오운도 본 고을의 선배로서 지금 향교의 제독(提督)으로 있다.” 『함주지』 편찬에 참여한 오운, 이칭, 박제인, 이정 등은 모두 함안의 사족으로 조식의 문인들로서, 정구 자신이 남명과 교류했다는 점에서 부임하기 이전부터 아는 사이였을 것으로 보인다.

오운[1540~1617]은 『함주지』의 발문을 쓸 정도로 편찬에 적극 참여한 인물이다. 본관은 고창(高敞)이며, 자는 태원(太源), 호는 죽유(竹牖)·죽계(竹溪)이다. 함안 모곡리에서 출생했는데, 그의 집안이 함안에서 살기 시작한 것은 증조할아버지 오석복이 의령 현감에서 퇴직한 후 이곳에 정착하면서부터이다. 오운의 증조할머니, 즉 오석복의 부인이 함안 사람이었기 때문에 함안을 선택하여 퇴거한 것으로 보인다. 오운의 문집 『죽유 선생 문집(竹牖先生文集)』에 실려 있는 오운의 연보에 따르면, 1558년(명종 13) 19세에 김해산해정(山海亭)으로 조식을 찾아가 제자가 되었으며, 25세 때 도산 서당(陶山書堂)으로 이황을 찾아가 제자가 되었는데, 인재로 인정받았다. 1583년(선조 16) 충주 목사 겸 춘추관 편수관으로 있다가 이듬해 파직당해 한 해 남짓 의령 가례리(佳禮里) 별서(別墅)에 머물다가 1586년에 함안 고향으로 돌아와, 그해 겨울 함안 군수로 부임한 정구와 함께 사직단(社稷壇) 문제를 논의하여 중수 사업을 추진하였다. 오운『함주지』 편찬에 참여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때 낙향하여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박제인[1536∼1618]의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는 중사(仲思), 호는 황암 또는 정묵재(靜默齋)이다. 박앙(朴盎)의 5세손으로 함안에 거주하였다. 24세 때인 1559년에 남명의 문하에 급문하여 수학하였다. 형조 좌랑을 역임한 바 있다. 이정[1541∼1613]의 본관은 재령(載寧)이며, 자는 여함(汝涵), 호는 모촌(茅村)으로, 원당(元塘)에 거주하였다. 이정함안 모곡리에서 참판 이경성(李景成)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식의 문하로 임진왜란 때 함안 군수 유숭인(柳崇仁)의 휘하에서 소모관(召募官)으로 의병을 모집하고 진해·창원 등지에서 전공을 세웠다. 이칭[1535∼1600]의 본관은 광평(廣平)이며, 자는 여선(汝宣), 호는 황곡(篁谷)이다. 이순조(李順祖)의 손자로 함안에 거주하였다.

『함주지』 편찬을 이 5명이 주도한 것은 확실하지만, 이 외에도 편찬에 참여한 인사는 더 있었을 것이다. 편찬을 의논할 때 참여한 ‘유사(儒士)’ 가운데 정구를 제외한 4명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당시 함안의 사족이 대거 참여했을 것이다. 1600년 12월에 오운이 쓴 발문에서는 『함주지』 편찬 시절을 회상하면서 “당일 『함주지』를 편찬했던 선비들은 10여 년이 지나는 사이에 영락하여 거의 다 사라지고 지금 살아서 볼 수 있는 사람은 박제인, 이칭, 이정 등 몇 명뿐이다.”라고 한 데서 오운을 비롯한 4명 외에도 여러 유사들이 『함주지』 편찬에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함주지』 편찬은 군수 정구가 주도한 것이지만 함안 재지 사족의 요구와 참여로 짧은 기간 안에 완성될 수 있었다.

[함주지의 내용 구성]

『함주지』의 편제는 서문(序文), 목록(目錄), 본문(本文), 발문(跋文) 순서로 구성하였다. 판본에 따라서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 소장의 필사본의 경우 서문과 발문을 모두 본문 뒤에 붙인 것이 있기도 하고, 국립 중앙 도서관 소장의 석판본(石板本)의 경우, 발문 뒤에 조경식(趙景植)[1678∼1722]이 고려 조 함안의 인물 14명을 보충한 ‘제함주 지신 증인물 전후(題咸州誌新增人物傳後)’, ‘제함주 지신 증충효 전후(題咸州誌新增忠孝傳後)’, ‘제함주 지신 증열녀 전후(題咸州誌新增烈女傳後)’, ‘제함주 지신 증공신 전후(題咸州誌新增功臣傳後)’ 등이 붙어 있는 판본도 있다. 경상 대학교 문천각 소장의 수집본(蒐輯本)은 서문과 목록 사이에 「함주군 지도(咸州郡之地圖)」가 끼워져 있다.

서문은 1587년(선조 20) 8월에 정구가 쓴 것이며, 발문은 1600년에 오운이 쓴 것과 1603년에 임흘(任屹)이 쓴 것이 함께 묶여 있다. 『함주지』 본문은 경사 상거(京師相距)·사린 강계(四隣疆界)·건치 연혁(建置沿革)·군명(郡名)·형승(形勝)·풍속(風俗)·각리(各里)·호구 전결(戶口田結)·산천(山川)·토산(土産)·관우(館宇)·성곽(城廓)·단묘(壇廟)·학교 서원(學校書院)·역원(驛院)·군기(軍器)·봉수(烽燧)·제언(堤堰)·관개(灌漑)·정사(亭榭)·교량(橋梁)·불우(佛宇)·고적(古蹟)·임관(任官)·명환(明宦)·성씨(姓氏)·인물(人物)·우거(寓居)·유배(流配)·선행(善行)·규행(閨行)·견행(見行)·문과(文科)·무과(武科)·사마(司馬)·총묘(塚墓)·정표(旌表)·책판(冊板)·제영(題詠)·총담(叢談)으로 모두 40개 항목으로 구성되었다.

『함주지』의 40개 구성 항목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경상도 함안군의 서술 항목 수인 22개에 거의 배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만큼 함안에 대한 정보가 풍부하게 담겨 있음을 보여준다. 구성 항목 수만 늘어난 것이 아니라,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이미 수록된 항목의 내용도 조사가 추가되는 등 풍부하게 서술하였다. 예컨대 『신증동국여지승람』 함안군 산천조에는 여항산(餘航山), 파산(巴山), 생동산(生童山), 방어산(防禦山), 대현(大峴), 용화산(龍華山) 등 산 6곳과 정암진(鼎巖津), 풍탄(楓灘), 대천(大川), 파수(巴水), 도장연(道場淵) 등 5곳이 조사되었는데, 『함주지』에는 봉우리와 고개를 포함하여 모두 18곳의 산과 시내와 못, 샘 등을 포함하여 20곳의 천(川) 등 산천 38곳이 조사 정리되어 있다.

인물 관련 항목도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명환(名宦)·인물(人物)·우거(寓居)·효자(孝子) 등 4개 항목으로 구분했는데, 『함주지』는 임관(任官)·명환(明宦)·인물(人物)·우거(寓居)·유배(流配)·선행(善行)·규행(閨行)·견행(見行)·문과(文科)·무과(武科)·사마(司馬) 등 11개 항목으로 늘어났다. 항목이 증가했을 뿐 아니라 수록된 인원도 큰 차이를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경우 함안의 인물로 명환조에 4명, 인물조에 2명, 우거조에 3명, 효자조에 2명 등 11명 정도 소개하였는데, 『함주지』는 임관조를 제외하여도, 명환조에 11명, 인물조에 11명, 우거조에 20명, 유배조에 1명, 선행조에 7명, 규행조에 6명, 견행조에 38명, 문과조에 22명, 무과조에 25명, 사마조에 25명 등 연인원 166명을 소개하고 있다. 누정의 경우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함안의 누정으로 청범루(淸範樓) 하나만 소개되었는데, 『함주지』에서 청범루는 관우(館宇)조로 옮겨지고, 삼수정(三樹亭) 등 13개의 정자가 소개되었다. 사묘의 수도 증가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소재 함안의 사묘는 사직단(社稷壇), 문묘(文廟), 성황사(城隍祠), 여단(厲壇) 등 4곳인데, 『함주지』는 여기에다 함안 각 리마다 설치되었던 상리 사단(上里社壇) 등 17개의 사단과 아견 연단(阿見淵壇), 여항 산단(餘航山壇)이 추가로 소개되었다.

『함주지』에 새로 수록된 항목 가운데 ‘각리(各里)’ 항목이 주목된다. 이 항목은 『신증동국여지승람』 단계까지 이전에는 수록된 적이 없는 항목으로, 조선 시대 군현 하부의 행정 단위를 면리(面里)로 편제했던 당시 지방 사회의 모습을 잘 반영하는 것이다. 『함주지』의 각리조에는 상리(上里), 하리(下里), 병곡리(竝谷里), 비리곡리(比吏谷里), 대곡리(大谷里), 평광리(平廣里), 산족리(山足里), 죽산리(竹山里), 안도리(安道里), 남산리(南山里), 우곡리(牛谷里), 백사리(白沙里), 마륜리(馬輪里), 대산리(大山里), 대산리(代山里), 안인리(安仁里), 산익리(山翼里) 등 17개 리가 실려 있다. 여기에서 리는 면(面)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 하부 행정 단위는 ‘방(坊)’으로 설정되어 17개 리에 소속된 방은 모두 148개였다. 함안의 리 소속의 방은 면리제에서 리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 명칭은 촌(村), 동(洞), 리(里) 등 다양하였다. 다음 평광리의 서술 내용에서 보듯이, 각 리에 대한 서술은 리마다 명칭의 변화, 사방의 강계, 동서와 남북의 거리, 크기, 소속 방(坊)의 수와 명칭, 토지의 비척‚ 장마와 가뭄의 정도‚ 거주민의 신분‚ 풍속까지 기재되어 있다. 이는 이후의 읍지들에서 찾아볼 수 없는 상세한 기록이며, 이를 통해 각 리마다 당대의 현실적 상황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평광리는 본래 평관(平館)이라 하였는데, 만력(萬曆) 병술년[1586] 겨울에 고쳤다. 읍성(邑城)에서 서쪽으로 20리에 위치하였고 동쪽으로 대곡리, 남쪽으로 진주 경계와 접해 있고, 서쪽으로 산족리, 북쪽으로 안도리와 이웃하고 있다. 남북은 7리, 동서는 겨우 1리쯤이다. 소속 방은 다섯으로, 장안동(長安洞)·지견동(知見洞)·모영동(毛榮洞)·명지동(明知洞)·사리동(沙里洞)이다. 이 리(里)는 땅이 협소하고 척박하여 주민이 적었다. 예부터 이곳에서 의관(衣冠)이 많이 나왔으며, 풍속은 검소하고 질박한 것을 숭상하고 제사에 힘쓴다.”

호구와 경지 면적의 액수도 각 리 별로 기록하고 있어서, 당시 함안군 리마다 사회 경제 형편을 엿볼 수 있다. 지리서에서 호구(戶口)와 전결(田結)의 기재는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誌)』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서 군현 별로 총액만 기재했던 것을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기재하지 않았던 것인데, 『함주지』에서는 호구와 전결을 각 리마다 구분하여 일목요연하게 기재하였다. 호수는 기재하지 않고 인구를 남과 여로 구분하여 기재하였다. 『함주지』에 수록된 당시 함안의 총 인구는 총 1만 5960구 중 남자 8,177구, 여자 7,792구였다. 전결(田結)은 원장(元帳)에는 한전 4,551결 71부 3속, 수전 1,731결 68부 1속으로, 총 6,283결 39부 4속이었다.

함안 읍치(邑治)에 자리잡았던 관청 시설과 역대 군수의 부임, 이임 시기를 상세히 기재한 것도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정보이다. 관청 시설은 ‘관우(館宇)’ 항목에서 소개하는데, 동헌(東軒), 대청(大廳), 서헌(西軒), 낭청방(郞廳房), 중대청(中大廳), 서하방(西下房), 서중방(西中房), 남별실(南別室), 대문(大門), 범청루(淸範樓), 군기방(軍器房), 관청(官廳), 아사(衙舍), 경창(稤倉), 의원(醫院), 서역소(書役所), 노비소(奴婢所), 형옥(刑嶽), 동문루(東門樓), 북문루(北門樓), 남문루(南門樓), 향사당(鄕射堂) 등 22곳 시설물의 위치와 창건 내력을 밝힘으로써 함안의 읍치 경관을 엿볼 수 있다. 함안군의 역대 군수 명단은 ‘임관(任官)’ 항목에서 서술했는데, 고려공민왕 대 지군사(知郡事)로 부임했던 백현진(白玄進)부터 1586년(선조 19) 당시 군수로 부임한 정구까지 99명의 지방관 명단과 그들의 관계(官階) 임퇴 연도를 기재하였다. 군수 명단의 앞에는 1494년(성종 25) 당시 함안 군수였던 강백진(姜伯珍)이 쓴 「임관 제명기서(任官題名記序)」가 수록되어 있고, 군수 명단 끝에는 정구가 쓴 「임관 제명기발(任官題名記跋)」이 첨부되었다. 그 내용으로 보아 『함주지』 임관 항목의 서술은 강백진이 함안 군수 선생안(先生案)을 만든 이후 역대 군수들이 이어서 작성해 놓았던 자료를 활용하여 수록한 것으로 보인다.

[함주지의 편찬과 보존]

정구는 지방관으로 부임하는 지역마다 통치와 교화를 위한 방안의 하나로 읍지를 편찬하였다. 1580년 창녕 현감으로 재직 중에 『창산지』를, 1584년 동복 현감이었을 때 『동복지』를 찬술했던 것처럼, 정구는 당시 함안 군수로 부임하여 읍지를 편찬하였다. 『함주지』는 함안 군수로 부임한 정구가 함안의 재지 사족 이칭, 박제인, 이정, 오운 등을 만나면서 편찬이 가시화되었다. 1586년 10월에 군수로 부임한 정구는 일상의 군 행정 업무를 수행하면서 사직단을 수리하고 박한주 사당의 건립과 다물의 묘소를 정비하는 등 고을의 풍속 교화와 관련한 사업들을 펼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함안의 산천과 풍속에 관한 기록들을 수집하여 군지를 편찬할 기반을 조성하였다. 『함주지』 편찬 작업이 시작된 것은 1587년(선조 20) 봄부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구가 『함주지』 서문을 1587년 8월에 썼다는 점과 오운의 발문에서 ‘몇 개월이 걸려 탈고하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서문에서는 열흘 만에 완성했다고 했지만, 연초부터 편찬 작업에 들어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함주지』 서술 내용 가운데에는 기존 지리서인 『경상도지리지』,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서술 항목을 ①그대로 옮긴 것, ②기존 서술 항목을 보완한 것, ③항목을 새로 설정하여 쓴 것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서술 항목 가운데 경사 상거·사린 강계·건치 연혁·군명·풍속·역원·봉수·제언 등 8개 항목은 기존 지리서에서 서술된 내용을 거의 그대로 옮긴 것이고, 산천·토산·성곽·정사·학교·불우·단묘·고적·명환·인물·우거·제영 등 12개 항목은 기존 지리서의 서술 내용을 수정 보완하거나 추가하여 서술한 것이다. 이 중에 산천이나 정사, 단묘, 인물, 제영 등은 새로 쓴 것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기존 지리서의 내용을 대폭 보완하였다. 『함주지』 서술 항목 중 ‘각리’, ‘임관’ 등 20개 항목은 이전 지리서에 없는 내용을 새로 쓴 것이다. 분량만 비교해도 새로 수록된 항목의 서술 내용이 80% 정도 차지하고 있어, 『함주지』는 거의 새로 쓴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으며, 그만큼 편찬하는 데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정구가 그의 서문에서 열흘 만에 완성했다고 한 것은 사실로 보기 어렵다.

『함주지』 편찬 작업은 수령의 관아에서 이루어진 것 같다. 오운의 발문에 따르면, ‘유사를 불러모아 군지를 편찬하기로 의논하고, 관아 안에 국(局)을 설치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때 설치된 ‘국(局)’은 군지 편찬국이었을 것이다. 이곳에서 군수 정구를 비롯하여 오운, 이칭, 박제인, 이정 등과 함안 지역 유사들이 함께 함안 관련 자료를 수집, 정리하고 서술 작업을 공동으로 수행하였다. 서술 항목을 분담하여 서술했을 가능성도 있다. 1587년 8월 『함주지』 편찬 완료된 이후에도 정구에 의해 부분적으로 수정 보완이 이루어졌던 것 같다. 그것은 단묘(壇廟) 조에 실려 있는 여단(厲壇)의 중수 시기를 만력 무자년[1588] 봄으로 전하고 있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 『함주지』는 이보다 1년 전에 완성된 것인데, 이 기사가 들어 있다는 것은 『함주지』 완성 후 보완이 이루어졌음을 말해 준다. 정구가 쓴 『함주지』 서문은 만력 정해년[1587] 8월자와 기축년[1589] 1월자 2개가 전해지고 있는데, 후자는 부분적으로 수정 보완한 뒤에 쓴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함안의 읍지가 완성되었지만 정구가 관직을 사직하게 되면서 간행되지는 못하였다. 정구는 군수직을 이임하면서 『함주지』 원고도 함께 가져갔던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정구가 소장했던 서적들은 해인사에 보관될 수 있었고, 그래서 『함주지』도 함께 겨우 보전될 수 있었다.

『함주지』가 빛을 보게 되는 것은 편찬에 참여했던 오운을 한양에서 재회하면서부터이다. 1599년(선조 32) 5월 장예원 판결사(掌隷院判决事)로 임명된 오운은 이듬해 7월부터는 충좌위 부사과 겸 오위장(忠佐衛副司果兼五衛將)으로 재직하였으며, 정구는 이해 1월 충좌위 부호군(忠佐衛副護軍)에 이어 9월 충무위 사직(忠武衛司直)을 거쳐 10월에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副總管)으로 재직하였다. 오운과 정구의 상봉은 바로 이해 12월 근무지 숙위소(宿衛所)에서 이루어졌다. 이때 오운과 정구는 서로 『함주지』를 편찬하던 때의 일들을 이야기하다가 정구가 그 원고를 보여주었다. 오운은 그 원고를 검토한 후 종이를 구하여 등사(謄寫)함으로써 이를 지식인 사회에서 열람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 『함주지』 판본은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 소장의 필사본과 국립 중앙 도서관 소장의 석판본(石板本), 경상 대학교 문천각 소장의 수집본이 유통되고 있다.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 소장의 필사본은 오운이 필사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이 외의 것은 필사본을 저본으로 하여 판각되거나 필사된 것들이다.

[함주지의 역사적 의미]

『함주지』는 현존하는 수많은 읍지 가운데 가장 오래된 읍지로, 함안 지역의 정보뿐 아니라 이후 조선 시대 읍지 체제의 기본이 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함주지』의 편제와 구성은 이후에 편찬된 읍지에 큰 영향을 주었다. 『진양지(晉陽誌)』 등 이후 편찬된 주요 사찬 읍지는 거의 『함주지』를 모델로 편찬되었다. 『함주지』는 체재나 내용에 있어 조선 전기의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조선 후기의 『여지도서』로 이어지는 가교 역할을 하였고, 후대에 편찬되는 함안 지리지들의 모범이되었다.

『함주지』는 『동국여지승람』을 상당 부분 참조하였으나, 항목 설정과 내용이 더욱 세분화되고 자세하여 『동국여지승람』 단계 지리서의 편찬 전통을 계승 발전시켰다고 할 수 있다. 당시까지 함안의 역사적 모습을 비롯하여 당대 모습까지 상세하게 기록해 놓았으므로, 조선 중기 함안 지역의 사정을 살펴보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임진왜란 직전 시기에 편찬된 자료이기 때문에 전란으로 소실되기 이전 함안 지역의 사회 경제적 형편과 문화 현상을 세밀하게 수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역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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