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혁중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200826
한자 安赫中
영어공식명칭 An Hyeokjung
이칭/별칭 응장(應章),안승학(安昇鶴)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검암리
시대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고은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9년 5월 14일연표보기 - 안혁중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9일 - 안혁중 함안읍 만세 운동 참가
몰년 시기/일시 1919년 9월 22일연표보기 - 안혁중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77년 - 안혁중 대통령 표창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1년 - 안혁중 건국 훈장 애국장 추서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3월 19일 - 안혁중 함안읍 만세 운동 참가
출생지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검암리
거주|이주지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검암리
활동지 경상남도 함안군
묘소 안혁중 묘소 - 경상남도 함안군 법수면 주물리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함안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함안읍 만세 운동은 서울의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하고 돌아온 조한휘(趙漢輝)·한종순(韓鍾淳)·이찬영(李讚榮) 등이 함안군 대산면에 사는 안지호(安知鎬)와 3월 19일 함안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면서 일어났다. 1919년 3월 19일 정오 읍내 봉성동에서 수백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 만세 운동이 전개되었고, 오후 2시 3,000여 명의 군중은 경찰 주재소로 시위행진하였다. 마산 경찰 서장과 현지 경찰이 출동하여 무력 진압하려 하자 군중은 경찰 주재소의 공문서와 건물을 파괴하였다. 또한, 등기소·우편소·일본인 소학교로 시위행진하며 건물을 파괴하였다. 하지만 마산 중포병 대대 병력 16명이 도착, 현지 경찰과 합세하여 주동자를 검거하며 끝이 났다.

[가계]

안혁중(安赫中)[1879~1919]은 자는 응장(應章), 다른 이름은 안승학(安昇鶴)이다. 아들은 안상복(安商復)·안상을(安商乙)·안상로(安商魯)이다. 손자는 안명준(安明濬)·안동조(安東祚)·안성준(安成濬)·안태준(安泰濬)이다.

[활동 사항]

안혁중은 1879년 5월 14일 함안군 가야읍 검암리에서 태어났다. 평소 투철한 애국 애족 정신을 가지고 있었는데 함안읍 만세 운동이 계획되자 가야읍 일대의 군중을 동원하는 데 앞장섰다. 함안읍 만세 운동으로 체포되어 3년 형을 선고 받았다. 판결문에는 “피고 안혁중은 동 소요에서 태극기를 흔들면서 선두에 서서 군중과 함께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고 함안 군청, 보통학교 및 소학교에 침입하여 군중을 선동 지휘하였으며, 기타무라[北村] 경찰 서장에 대하여 대한 독립 만세를 불렀다는 사실 증명서를 작성하여 날인하라고 강요한 죄가 있다”라고 논죄하였다. 우치다[內田] 순사는 "안혁중이 태극기를 흔들고 선두에서 지휘하였다", 가네모리[金森] 등기소 서기는 "등기소 안에서 폭행을 하였다"라고 증언하였다.

안중혁은 1919년 8월 24일 형이 확정되어 대구 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잔혹한 형벌에 시달려 1919년 9월 22일 41세로 옥사하였다. 그의 유해가 대구에서 함안 법수까지 운구되었는데, 각 고을을 지날 때마다 남녀노소가 곡을 하고 제(祭)를 지냈으며 운상꾼을 대접하였다고 한다.

[묘소]

묘소는 함안군 법수면 주물리 사평 마을청룡등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77년 대통령 표창, 1991년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함안군 법수면 주물리에 비가 세워져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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