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찬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200838
한자 李讚榮
영어공식명칭 I Chanyeong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
시대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노익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4년 12월 30일연표보기 - 이찬영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9일 - 이찬영 함안읍 만세 운동 주도
몰년 시기/일시 1925년 7월 7일연표보기 - 이찬영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77년 - 이찬영 건국 포장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1년 - 이찬영 건국 훈장 애족장 추서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3월 19일 - 이찬영 함안읍 만세 운동 주도
출생지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
활동지 경상남도 함안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함안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이찬영(李讚榮)[1894~1925]은 함안군 함안면 봉성동에서 태어났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국권 회복은 인재 양성에 있다고 보고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1910년 한일 병합 이후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모의하였다. 고종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함안 지역 인사인 조한휘(趙漢輝)[한학 교사], 한종순(韓鍾淳)[당시 함안면장 아들], 박건병(朴鍵秉)[동명 학교 교사], 강기수(姜琪秀)[동명 학교 교사], 조병흠(趙丙欽), 한관열(韓灌烈), 안재휘(安在輝) 등과 서울에 올라갔다가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이찬영은 귀향한 후에 지역의 동지들과 3월 19일 함안읍 장날에 독립 만세 운동을 하기로 모의하였다. 그들은 함안군 대산면의 안지호(安知鎬)와 연락을 취하며 함안읍 만세 운동을 준비하면서 태극기와 독립 선언서를 제작하였다. 이찬영은 이희석(李喜錫), 조한휘와 함께 독립 선언서를 알기 쉽게 정리하여 등사하는 일을 하였다.

함안 장날인 3월 19일 오후 1시경 비봉산에서 고천제를 올리는 것으로 함안 만세 운동이 시작되었다. 오후 2시경 이희석이 독립 선언문 낭독하고 3,000여 명의 군중이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였다. 군중은 함안 경찰 주재소와 우체국, 함안 심상 소학교, 함안 공립 보통 소학교, 함안 공립 보통 학교, 등기소 등을 공격하였다. 당시 조한국(趙漢國), 강상중(姜相中)은 마산의 일본군 수비대와 연락되는 전화선을 끊어 놓았다. 오후 5시 40분경 함안으로의 전화가 불통되자 비상 사태가 돌발한 것으로 짐작하고 마산 중포병 대대 병력 16명이 도착하였다. 마산 중포병 대대 병력과 현지 경찰이 합세하여 시위 주동자를 검거하던 중 이찬영은 검거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였으나 체포되어 1920년 1월 20일 대구 복심 법원에서 출판법 및 소요 혐의로 징역 6년 형을 선고 받았다. 대구 형무소에서 형기를 치르다가 고문 후유증으로 보석되었지만 1925년 7월 7일 작고하였다. 현재 유족은 파악되지 않는다.

[상훈과 추모]

1977년 건국 포장, 1991년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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