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200820
한자 安時中
영어공식명칭 An Sijung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 강명리
시대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장혜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0년 12월 20일연표보기 - 안시중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9일 - 안시중 함안읍 만세 운동 주도
몰년 시기/일시 1974년 11월 3일연표보기 - 안시중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77년 - 안시중 대통령 표창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1년 - 안시중 건국 훈장 애족장 추서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3월 19일 - 안시중 함안읍 만세 운동 주도
출생지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 강명리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함안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안시중(安時中)[1880~1974]은 1890년 12월 20일 함안군 함안면 강명리에서 태어났다. 함안읍 만세 운동은 고종의 장례식과 독립 선언식에 참여하고 귀향한 조한휘(趙漢輝)·한종순(韓鍾淳)·이찬영(李讚榮)·조병흠(趙丙欽)·박건병(朴建秉)·강기수(姜琪秀)·한관렬(韓灌烈) 등이 계획하였다. 실질적 지도자는 이희석(李喜錫)으로, 안지호(安知鎬)와 의거를 준비하였다. 3월 15일 동지들이 협의한 후 조병흠·한관렬 등이 독립 선언서를 인쇄하고 한종순은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박노일(朴魯一)·김상집(金祥集)·조병대·백낙삼(白樂三)·안갑중 등은 인근의 군중을 동원하였다.

함안 장날이던 1919년 3월 19일 오후 1시경 비봉산에서 고천제를 올리는 것으로 시위는 시작되었다. 오후 2시경 이희석이 독립 선언문을 낭독하고 3,000여 명의 군중이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행진할 때 안시중도 선두에 있었다.

군중은 함안 경찰관 주재소를 습격하고 또한 우체국, 함안 심상 소학교, 함안 공립 보통 소학교, 함안 공립 보통학교, 등기소 등도 공격하였는데 안종호도 적극 가담하였다. 군중이 마산 경찰 서장 기타무라[北村]와 함안 경찰서 순사 부장 오하야시[大林]에게 독립운동 사실 증명서를 강요할 때 안시중도 동참하였다. 함안읍 만세 운동은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진행된 대규모 의거이었다. 이 일로 마산 지방 법원 원심에 회부된 사람만 63명이었다. 이 수치는 단일 시위 운동으로는 다른 의거와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안시중함안읍 만세 운동 당시 태극기를 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군중의 선두에서 군중을 지휘하다 검거되었다. 부산 지방 법원 마산 지청에서 안시중이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시위하고, 함안 등기소와 학교 등의 기물을 파괴하였다는 증언이 나왔다. 안시중은 2년 6개월 형을 선고 받고 항소하였으나 대구 복심 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1974년 11월 3일 향년 85세로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77년 대통령 표창, 1991년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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