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200674
한자 順興 安氏
이칭/별칭 흥녕 안씨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경상남도 함안군
집필자 류진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1491년 - 안창공 출생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1491년 - 안관 출생
입향조 몰년 시기/일시 1534년 - 안창공 사망
입향조 몰년 시기/일시 1553년 - 안관 사망
입향 시기/일시 1519년 직후로 추정연표보기 - 안창공
입향 시기/일시 1523년연표보기 - 안관
본관 순흥 안씨 -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입향지 모곡 - 경상남도 함안군 산인면 모곡리
입향지 사락동 -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신음리
세거|집성지 경상남도 함안군 산인면 모곡리
세거|집성지 경상남도 함안군 산인면 송정리
세거|집성지 경상남도 함안군 여항면 외암리
세거|집성지 경상남도 함안군 법수면 우거리
세거|집성지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신음리
세거|집성지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도항리
세거|집성지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가야리
세거|집성지 경상남도 함안군 산인면 부봉리
세거|집성지 경상남도 함안군 대산면 옥렬리
세거|집성지 경상남도 함안군 대산면 하기리
세거|집성지 경상남도 함안군 대산면 구혜리
세거|집성지 경상남도 함안군 여항면 주서리
성씨 시조 안자미(安子美)
입향 시조 안창공(安昌恭)|안창렴(安昌廉)|안관(安灌)

[정의]

안자미를 시조로 하고, 안창공·안창렴과 안관을 입향조로 하는 경상남도 함안 지역의 세거 성씨.

[개설]

순흥 안씨(順興安氏)는 고려 시대 안자미(安子美)를 시조로, 안창공(安昌恭)[1491~1534]·안창렴(安昌廉)과 안관(安灌)[1491~1553]을 입향조로 하고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이다. 이를 '흥녕 안씨(興寧安氏)'라고도 한다. 오늘날 함안에서 '조(趙)·이(李)·안(安)'이라 하여 세칭 3대 성씨로 일컬어지고 있다.

[연원]

고려 신종 때 신호위 상호군(神虎衛上護軍)에 추봉된 안자미는 안영유(安永儒)·안영린(安永麟)·안영화(安永和) 등 3형제를 두었다. 이들 후손들이 오늘날 소위 순흥 안씨 1·2·3파라고 하는 추밀공파(樞密公派)·별장공파(別將公派)·교서공파(校書公派)로 나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1파에는 회헌(晦軒)안향(安珦)[1243∼1306]이 크게 현달하여 가문이 번창했다. 2파에서는 순흥 부원군(順興府院君)에 봉해진 안문개(安文凱)[?∼1338]가 이름이 났으며, 3파에서는 우문관 대제학(右文館大提學)을 지내고 「죽계 별곡(竹溪別曲)」을 남긴 근재(謹齋)안축(安軸)[1282~1348]이 유명하다.

[입향 경위]

조선 중종 때 함안에 입향한 순흥 안씨는 1파와 3파이다. 1파의 안창공·안창렴 형제는 경상남도 함안군 산인면 모곡(茅谷)으로 입향하였다. 3파의 안관은 1523년에 완천(浣川)박덕손(朴德孫)과 함께 남으로 내려와 여항산 기슭에 은거하였다. 이들이 함안으로 내려온 이유는 1519년의 기묘사화(己卯士禍)와 1521년에 일어난 신사무옥(辛巳誣獄) 때문이다. 당시 일족인 안당(安瑭)과 안처겸(安處謙)·안처근(安處謹) 등이 처형당하자 같은 문족(門族)으로서 화를 피해 처의 고향인 함안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안창공의 처부는 함안 모곡에 거주하고 있던 재령 이씨이개지(李介智)이다. 안창렴의 처부 이존인(李存仁) 역시 함안에 기반을 가지고 있던 광평 이씨정무공이호성(李好誠)의 손자이다. 3파의 후손인 안관 역시 처의 고향인 함안으로 이주해 오면서 함안의 주요 성씨로 자리 잡게 되었다.

[현황]

1파 입향조 안창공은 안향의 11세손으로 중종 때 병절교위(秉節校尉)를 지냈다. 안창공 손자 모헌(茅軒)안민(安愍)[1539~1592]은 임진왜란 때 김해에서 전사하였다. 안민의 장자 장암(壯庵)안신갑(安信甲)[1564~1597]은 정유재란 때 산청환아정(換鵝亭) 전투에서 사절(死絶)하여 선조(宣祖)가 정려를 내렸다. 안민의 아우 죽계(竹溪)안희(安憙)[1551∼1613]는 문과에 급제하여 대구 부사(大邱府使)를 지냈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웠다. 후손들은 처음 산인면 모곡에 정착한 후, 2015년 현재 경상남도 함안군 여항면 외암리, 산인면 모곡리송정리, 법수면 우거리 등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3파의 입향조 안관은 안축의 7세손으로 1491년 서울 금천(衿川)에서 태어나 정암(靜庵)조광조(趙光祖)[1482~1519]를 종유하였다. 함안으로 낙남(落南)한 후 여항산 기슭의 사락동에 정사를 지어 취우정(聚友亭)이라 자호(自號)하고 후학들을 가르쳤다. 안관의 손자 신촌(新村)안황(安璜)은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선무공신(宣武功臣)에 책훈되었다. 후손 은계(殷溪)안국장(安國章)[1685~1733]은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어려운 사람들을 구휼하여 암행어사 박문수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근대에 이르러 회산(晦山)안정려(安鼎呂)는 면우(俛宇)곽종석(郭種錫)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저서로 『오서집의(五書釋義)』·『상변요의(常變要義)』와 문집 『회산집(晦山集)』을 남겼다. 취우정안관의 후손들은 함안군 내 두루 세거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신음리·도항리·가야리, 산인면 부봉리, 대산면 옥렬리·하기리·구혜리, 여항면 주서리 등에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관련 유적]

경상남도 함안군 여항면 외암리에 있는 두릉 서원(杜陵書院)안민·안희·안신갑을 향사하고 있다. 안신갑 정려비(安信甲旌閭碑)는 경상남도 함안군 산인면 신산리에 있다. 정유재란 때 순절한 안신갑의 충절을 표창하여 선조가 어필과 함께 정려를 내렸다. 신암 서원(新巖書院)은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신음리에 있다. 취우정안관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1780년(정조 4)에 건립하였다. 취우정은 안관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신음리 사락동에 세운 정사(精舍)이다. 삼강비(三綱碑)는 안관의 손자 안유(安瑜)의 처 강씨와 세 아들의 충(忠)·효(孝)·열(烈)을 기리기 위해 1935년에 세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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