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200671
한자 咸安 趙氏
이칭/별칭 파산 조씨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경상남도 함안군
집필자 류진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본관 함안 - 경상남도 함안군
세거|집성지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말산리
세거|집성지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도항리
세거|집성지 경상남도 함안군 산인면 송정리
세거|집성지 경상남도 함안군 산인면 운곡리
세거|집성지 경상남도 함안군 법수면 강주리
세거|집성지 경상남도 함안군 법수면 대송리
세거|집성지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동촌리
세거|집성지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중암리
세거|집성지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하림리
세거|집성지 경상남도 함안군 대산면 대사리
세거|집성지 경상남도 함안군 칠서면 무릉리
성씨 시조 조정(趙鼎)

[정의]

조정을 시조로 하는 경상남도 함안 지역의 토착 세거 성씨.

[개설]

함안 조씨는 시조 조정(趙鼎) 이후로 함안에 정착하여 대를 이어 살아서 함안 지역 최대의 성족(盛族)으로 발전한 성씨이다. 이를 '파산 조씨(巴山趙氏)' 라고도 한다. 2014년 12월 31일 기준으로 함안 조씨의 후손은 전국에 총 12만 61가구에 38만 5715명으로 집계된다.

[연원]

함안 조씨의 시조 조정의 자는 우보(禹寶)이고, 호는 모당(慕唐)이며,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중국 후당인(後唐人)으로 신라 말에 두 아우 조부(趙釜)와 조당(趙鐺)을 데리고 한반도로 온 후 왕건(王建)[877~943]을 도와 합천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931년(고려 태조 14) 고창성(古昌城)[지금의 안동]에서 후백제의 견훤(甄萱) 군사를 대파하여 동경(東京) 관할 하에 있던 주현(州縣)의 항복을 받아 고려 건국에 큰 공을 세웠다. 그가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 대장군 원윤(元尹)에 오름으로써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삼고 함안을 본관으로 하였다.

이후 간송(澗松)조임도(趙任道)[1585 ~1664]의 『간송집(澗松集)』권1의 「간송 선생 세계도(澗松先生世系圖)」와 대소헌(大笑軒)조종도(趙宗道)[1537~1597]의 『대소헌 일고(大笑軒逸稿)』에 들어 있는 「세계도(世系圖)」에는 시조부터 10세 금은(琴隱)조열(趙悅)까지 계대가 이어져 있지만 근거한 문헌은 밝혀져 있지 않다.

[입향 경위]

문헌으로 고증할 수 있는 함안과 관계가 있는 최초 인물은 고려 말의 금은조열이다.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하림리에 있는 함안 조씨의 문중 묘역에서 가장 윗대가 금은조열이다. 조열은 공민왕 때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냈는데 생몰년은 미상이다.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지절을 지켜 벼슬을 버리고 군북면 원북리에 은거하였다. 한강(寒岡)정구(鄭逑)[1543∼1620]가 편찬한 『함주지(咸州誌)』에 금은의 행적을 「인물조」에 수록하고, 「총묘조(塚墓條)」에 "묘소가 방어산 동쪽 기슭에 있다."고 밝히고 있다. 또 맹사성(孟思誠)[1360~1438]이 지은 만은(晩隱)홍재(洪載)의 행장에 의하면, 조열은 함안 사람으로 전서 벼슬을 지냈으며, 만은홍재·성균관 진사 모은(茅隱)이오(李午)와 더불어 삼가(三嘉)에서 고려의 멸망을 슬퍼하며 자주 내왕한 것으로 되어 있다. 조선 후기 이채(李采)[1745~1820]가 지은 금은의 신도비에 "금은은 아들 넷을 두었다. 큰아들 조이(趙彛)는 신호위(神虎衛)를 지냈고, 둘째 조녕(趙寧)은 현감을 지냈으며, 셋째는 조항(趙恒)이고, 넷째는 조안(趙安)이다. 조안의 아들이 어계(漁溪)조려(趙旅)[1420~1489]이다."라고 하였다.

[현황]

현재 함안에 세거하고 있는 함안 조씨는 대부분 어계조려의 후손들이다. 조려는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정조 때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정절(貞節)이다. 함안의 서산 서원(西山書院)에 배향되었으며, 함안 사람 최초로 개인 문집인 『어계집(漁溪集)』을 남겼다.

조려의 큰아들 조동호(趙銅虎)는 군수를 지냈고, 둘째 조금호(趙金虎)는 첨지를 지냈다. 조동호의 큰아들로 참판공파 파조(派祖)인 조순(趙舜)[1467∼1529]은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조 참판에 이르렀다. 셋째 아들 조삼(趙參)[1473~?]도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집의를 지냈는데, 호가 무진(無盡)이다. 조삼은 충재(冲齋)권벌(權橃)[1478~1548]·신재(愼齋)주세붕(周世鵬)[1495~1554] 등과 더불어 학문을 강마하였으며, 주세붕이 「무진정기(無盡亭記)」라는 기문을 지었다. 넷째인 조적(趙績)[1477∼?] 역시 문과에 올라 벼슬이 판결사에 이르렀다. 삼 형제가 문과에 급제하여 당시 조씨 가문의 영예를 떨쳤다. 그 후 조선 중기에 이르러 남명(南冥)조식(曺植)[1501∼1572]의 문인인 대소헌조종도와 여헌(旅軒)장현광(張顯光)[1554~1637]의 문인 간송조임도가 가문을 빛냈다.

함안 조씨 역사 연구회 발표 자료에 보면, 2005년 1월 1일 기준으로 함안군 관내에 거주하는 함안 조씨 세대수는 가야읍말산리도항리를 중심으로 483세대, 산인면송정리운곡리를 중심으로 158세대, 여항면에 25세대, 함안면에 110세대이다. 또한 법수면강주리대송리를 중심으로 254세대, 군북면동촌리·중암리·하림리를 중심으로 484세대, 대산면대사리를 중심으로 183세대, 칠북면에 12세대, 칠서면무릉리를 중심으로 63세대, 칠원읍에 26세대로 모두 1,798세대이다.

[관련 유적]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에 있는 서산 서원은 생육신인 조려·원호(元昊)·김시습(金時習)·이맹전(李孟專)·성담수(成聃壽)·남효온(南孝溫) 등의 충절과 덕의(德義)를 숭모하여 1703년(숙종 29) 영남의 선비들이 세운 것이다. 1713년(숙종 39)에 사액(賜額)되었으며, 그 후 대원군 때 훼철되었다가 1980년에 복원되었다. 채미정(採薇亭)은 서산 서원 바로 앞 도로 건너편에 있다. 조려의 지절을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캐 먹으며 살다 죽은 주나라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에게 비견하였다. 채미정 뒤편 산이 백이산(伯夷山)이다.

어계 생가(漁溪生家)는 조려가 태어난 집으로, 1976년 12월 20일 경상남도 유형 문화재 제159호로 지정되었다. 어계 고택(漁溪古宅)으로 일컬어지는 원북재(院北齋)는 어계가 벼슬을 포기하고 낙향한 뒤 은거했던 곳이다.

무진정(無盡亭)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 괴산리에 있는 정자이다. 조려의 손자인 중종 때의 문신 무진조삼이 벼슬을 버리고 귀향한 후 정자를 짓고 자신의 호를 따서 ‘무진정’이라 하였다. 신재주세붕이 기문을 지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8.03.09 [현황] 수정 조삼: 조동호의 둘째 아들 -> 조동호의 셋째 아들 조적: 조동호의 셋째 아들 -> 조동호의 넷째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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