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200473
한자 趙任道 遺杏碑
영어공식명칭 Memorial Stone of Jo Imdo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비
지역 경상남도 함안군 칠서면 계내리 144-1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재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850년연표보기 - 조임도 유행비 건립
현 소재지 조임도 유행비 - 경상남도 함안군 칠서면 계내리 144-1지도보기
성격
양식 비갈형
관련 인물 조임도(趙任道)
재질
크기(높이, 너비, 두께) 100㎝[비신 높이]|43㎝[너비]|20㎝[두께]

[정의]

경상남도 함안군 칠서면 계내리에 있는 조선 후기 조임도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

[개설]

조임도(趙任道)[1585∼1664]는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덕용(德勇), 호는 간송당(澗松堂)이다. 1604년(선조 37) 향시에 합격하였고, 1605년 21세에 『관규 쇄록(管窺鎖錄)』을 저술하였다. 1608년 「거상 대절(居喪大節)」 10조(十條)를 써서 자손들이 교훈으로 삼도록 하였으며, 또 아버지의 언행록인 『추모록(追慕錄)』을 지었다. 1614년 동당시(東堂試), 그 이듬해 향해(鄕解)에 합격하였고,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향인(鄕人)이 그를 의병장으로 추대하였으나 신병(身病)으로 참여하지 못하였다. 1634년 공릉 참봉(恭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였고, 1638년 『취정록(就正錄)』을 쓰고 그 이듬해 『금라전신록(金羅傳信錄)』을 편찬하였다. 1644년 『대소헌 유사(大笑軒遺事)』를 찬하였으며, 1647년 대군 사부(大君師傅)에 임명되어 창녕까지 가다가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였다. 그 뒤 공조 좌랑으로 임명되었으나, 노병으로 사직하고 부임하지 아니하였다. 사헌부 지평에 증직되고, 함안의 송정 서원(松亭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간송집(澗松集)』 7권 4책이 있다.

조임도는 당파 분열로 어수선한 정국에 대하여 원인은 서로 옳다는 주장 때문에 선악(善惡)의 구별을 못하는 것이라며 공의(公義)에 따를 것을 강조하였다. 학문에 대해서는 대체로 이황(李滉)의 입장을 견지하였는데, 이언적(李彦迪)의 『대학 장구 보유(大學章句補遺)』에 대한 이황의 주장이 타당한 것이라 하였다. 그 이유는 전성(前聖)의 이론을 후성(後聖)이 보완하고 주희에서 비로소 정립된 것으로 보아 이황이 주희의 입장을 따르는 것은 극히 타당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건립 경위]

조임도 유행비(趙任道遺杏碑)는 1850년 조임도를 기리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위치]

함안군 칠서면 계내리 144-1번지 남지 철교 아래에 있다.

[형태]

비석의 위쪽이 원호(圓弧)를 이룬 비갈형이다. 크기는 높이 100㎝, 너비 43㎝, 두께 20㎝이다.

[금석문]

조임도 유행비 앞면에는 ‘징사 간송당 조 선생 유행비(徵士澗松堂趙先生遺杏碑)’라 하였고, 뒷면에는 ’숭정 기원 후 사 경술 구월 일 영산 신지임 서(崇禎 紀元後四庚戌九月日靈山辛志任書)’라 하였다.

[의의와 평가]

조선 후기 함안 출신 학자를 기억하고 추모하려는 지역민의 의지를 살필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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