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200293
한자 日帝 强占期
영어공식명칭 Japanese Colonial Period|Chosun under the Japanese Rule Time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함안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양미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일제 강점기 - 경상남도 함안군

[정의]

1910년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함안 지역의 역사.

[개설]

일제 강점기 함안은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식민지에 대한 저항이 치열하게 진행되었다. 특히 3·1 운동의 경우 어느 지역보다 치열하게 전개되어 일제 무력에 죽임을 당한 사람도 많았고, 이후에도 다양한 형태의 식민지 민족 해방 운동이 끊임없이 전개되었다.

[행정 구역]

1914년 3월 1일 부령(府令) 제111호로 상봉면·하봉면·사봉면이 진주로 환속되었고, 현재의 창녕군 영산면 길곡면의 사촌리·금암리 일부 및 내서면의 예곡리를 편입하였다. 이에 함안군은 함안면, 가야면, 군북면, 죽남면, 법수면, 대산면, 칠서면, 칠북면, 칠원면, 산인면, 여항면으로 11개 면을 관할하였다. 1933년 죽남면이 군북면에 편입되어 오늘날에는 가야읍, 칠원읍 2읍과 8개 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교육]

1910년 한일 병합 후 일제는 식민지 지배를 위한 새로운 법령을 시행하였다. 「조선 교육령」이 발표되어 1911년 6월 공립 함안 공립 보통학교, 1914년 3월 공립 칠원 보통학교가 개교하였다. 이에 따라 함안 지역의 대표적 사립 학교인 찬명 학교와 보흥 학교가 공립 학교로 편입되었다. 비록 명칭과 교육 사상은 달라졌지만 함안의 독립운동을 주도한 인물들은 공립 학교와 관련된 인물이 많았다.

1922년 제2차 「조선 교육령」이 발표된 후 공립 학교들이 증설되었다. 군북 공립 보통학교, 가야 공립 보통학교, 대산 공립 보통학교, 칠서 공립 보통학교, 여항 공립 보통학교, 법수 공립 보통학교, 칠북 공립 보통학교, 산인 공립 보통학교 총 8개가 1931년까지 개교하였다. 그리고 1937년 5월 개교한 함안 공립 농업 실수 학교[현 함안 고등학교]는 함안 최초의 농업 전공 초급 중학교이고, 이외에 1935년 설립된 월촌 간이 학교를 포함해 7개의 간이 학교가 있었다.

[언론]

1920년 창간된 『조선 일보』, 『동아 일보』, 『시사 신문』 등 민간지의 지방 보급은 지방 언론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함안 지역만의 지역 신문은 없었지만, 지방의 지국·분국에서 취재된 지방 기사가 민간 신문에 보도되며 지방 언론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확인할 수 있는 것은 1925년 3월 진주에서 개최된 경남 기자 대회에서 발족된 경남 기자 동맹에 함안은 마산, 창원, 진영, 고성, 통영과 함께 중부 분맹에 속해 활동한 기록이 남아 있다. 하지만 경남 기자 동맹은 만주 사변 이후 활동이 위축되면서 1933년 4월 함안에서 개최된 8회 기자 대회를 마지막으로 해체된 것으로 보인다.

[농업 구조]

일제 강점기 자작농 감소와 소작농 증가는 조선의 일반적인 현상이었으나, 특히 함안 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심각하였다. 이는 1921년과 1936년 조사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1921년에는 경상남도 전체에 비해 함안 지역의 자작 겸 소작농 비율이 6.13% 높았으나, 1936년에는 1921년 조사에 비해 지주가 1.08% 증가하고, 소작농 또한 10%가량 증가하여 소작농이 급격하게 증가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일제의 산미 증식 계획(産米增殖計劃)과 이를 수행하기 위해 설치된 각종 수리 조합들이 함안 지역 농민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소작농의 열악한 상황이 격렬한 항일 운동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3.1 운동]

일제 강점기 일제의 식민지 정책은 함안군 지역도 다른 지역과 다르지 않았다. 토지 조사 사업을 통한 토지 약탈 등이 전개되었고, 이에 대한 함안 군민들의 항일 운동은 다른 지역에 비해 격렬하였다. 특히 3·1 운동은 경상남도 다른 지역에 비해 먼저 시작되었고, 만세 시위 과정에서 인명 피해가 많았다.

칠북면 이령리 연개 장터 만세 운동은 1919년 3월 9일 거행되었는데, 경상남도에서 제일 먼저 발생한 의거이다. 1904년 경명 학교가 개교하고 함안이 낙동강 변에 위치하여 교역이 활발하였기 때문에 군중을 동원하기가 좋은 조건이었다. 이후 3월 19일 함안읍 만세 운동, 3월 20일 군북 시장 만세 운동, 3월 23일 칠원면구성리 시장 만세 운동 등으로 이어졌다. 함안읍 만세 운동은 군중이 독립운동을 벌였다는 독립운동 사실 증명서를 교부 받아 파리 만국 평화 회의에 제출하여 독립을 청원하고 일제의 강제 합병을 규탄하려 하였다는 점에서 다른 지역과의 차별성을 보여 준다.

군북 시장 만세 운동은 시위 과정이 격렬하여 인명 피해가 다른 지역의 만세 시위에 비해 엄청나 23명이 순국하고 18명이 부상당하였다. 일본 측 피해는 군인 12명이 부상하였고, 민간인 1명이 사망하였다. 이같이 희생자가 많았던 이유는 5,000명에 가까운 군중이 함안읍 만세 운동에서 구속된 애국지사를 석방하라고 요구하며 격렬한 시위를 벌이자, 진해 경중 포병 대대 군인과 일본 경찰이 발포하였기 때문이다.

[항일 운동]

만세 시위 이후에도 항일 운동은 계속되었다. 각 계급과 계층, 즉 노동·농민·여성·청년을 중심으로 한 운동이 활성화되었다. 이것은 만세 시위 이후 국내에 급속하게 유입된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 등의 새로운 사상이 영향을 미쳤는데, 이러한 사상들이 지식인과 학생들 사이에 확산되었기 때문에 흔히들 ‘문화 운동’이라 부르기도 한다.

함안 청년회는 1920년 7월 30일 ‘품성 향상, 지식 개발, 체육 장려, 산업 발달, 풍속 개량’의 5대 목적을 표방하면서 창립하여 야학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군북 청년회도 활동하였는데, 함창(咸昌) 강습소를 운영하고 강습소 재원 마련을 위하여 소인 극단의 순회공연도 하였다. 이 외에도 가야 청년회, 칠원 청년회, 함안 기독 연합 청년회 등도 만들어졌다.

이러한 초기 청년 운동은 사회주의 이념이 확산되면서 혁신 청년 단체들이 청년 운동의 중심으로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전국적인 조직으로 조선 청년 총동맹이 1924년 조직되었고, 이후 지방에도 조직되기 시작하였다. 함안의 경우 이전의 함안 청년회가 재창립 대회를 거쳐 혁신적인 모습을 띠기 시작하였는데, 가야 청년회가 재창립 총회인 혁신 총회를 통해 거듭나면서 소작 문제 등을 직접 언급하기 시작하였다. 1927년 함안 청년 동맹이 결성되었고, 1928년 2월 경남 청년 연맹의 가맹 단체로 활동하였다. 이후 함안 청년 동맹은 1931년 4월까지 활동하였다.

신간회 함안 지회도 결성되었다. 1927년 10월 16일 함안 청년 회관에서 신간회 본부에서 파견된 홍명희(洪命憙)와 안재홍(安在鴻)이 각각 ‘조선의 계급 변화’ 등에 대해 강연하였다. 신간회와 함께 1928년 군북 협동조합, 이듬해에 함안 협동조합이 설립되어 지역민의 일상적인 경제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함안 지역에서는 농민 운동도 활발하였다. 함안 농민 조합의 본격적 활동은 청년 동맹과 신간회 함안 지회 해소를 전후한 1931년 이후부터이다. 1931년 3월 가야 농조 지부, 군북 지부가 설치되었다. 1931년 가을 남해 척식 주식회사 함안 농장에서 소작인 700명에게 비료 대금을 부당하게 계산하여 폭리를 취하는 일[남해 척식 주식회사 함안 농장 비료 대금 징수 사건]이 발생하여 농민 조합이 사태 수습을 위해 노력하였고, 그 과정에서 검거되기도 하였다. 1935년 이후 농민 조합 활동이 일제 탄압으로 소강기에 접어들었지만 함안에서는 문학 청년 비밀 결사 사건, 일명 적색 문예회 사건 같은 저항 운동이 일어났다. 이처럼 일제 강점기 함안 지역은 민족 해방을 위한 움직임이 전 시기에 걸쳐 다양하게 연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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