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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200833
한자 李龍佑
영어공식명칭 I Yongu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
시대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노익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8년 12월 7일연표보기 - 이용우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9일 - 이용우 함안읍 만세 운동 주도
몰년 시기/일시 1930년 6월 26일연표보기 - 이용우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77년 - 이용우 대통령 표창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1년 - 이용우 건국 훈장 애족장 추서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3월 19일 - 이용우 함안읍 만세 운동 주도
출생지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함안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이용우(李龍佑)[1898~1930]는 1898년 12월 7일 함안군 함안면 봉성동에서 태어났다. 이용우는 나이 22세에 고종의 장례식에 참석한 함안 지역 인사인 조한휘(趙漢輝)[한학 교사], 한종순(韓鍾淳)[당시 함안 면장 아들], 박건병(朴鍵秉)[동명 학교 교사] 등에게서 서울의 독립운동에 대해 전해 들었다. 이들은 3월 19일 함안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 만세 운동을 모의하였다. 당시 함안군 대산면에 사는 안지호(安知鎬)와 연락을 취하며 3월 19일 함안읍 장날을 거사일을 정하고 태극기와 독립 선언서를 제작하였다. 이때 이용우도 곽종한(郭鍾漢), 이희석(李喜錫), 한종헌(韓鍾憲), 박노일(朴魯一)과 함께 모의에 참가하였다.

1919년 3월 19일 1시경 비봉산에서 고천제(告天祭)를 올리고, 이희석이 태평루에서 독립 선언문을 낭독한 후 3,000여 명의 군중이 주재소와 군청으로 시위행진을 하였다. 당시 안지호는 사전에 제작했던 태극기와 대한 독립가를 들고 시위대를 독려하다가 연행되었다. 이때 이용우는 시위 행렬의 선두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군중을 지휘하였다. 시위대를 저지하기 위하여 출동한 마산 경찰 서장 기타무라[北村]와 현지 경찰들이 무력을 행사하려 하자, 시위 군중은 주재소로 들어가 공문서를 파기하고 안지호를 탈출시켰다. 또한 군중은 군청 안으로 들어가서 군수 민인호(閔麟鎬)와 경찰관을 붙잡아 시위 운동의 증명서를 요구하고 제복과 모자를 벗기고 독립 만세를 외치라고 요구하였다. 이어 이용우는 군중과 함께 등기소, 우편소, 일본인 소학교를 습격하여 각종 공문서를 파기하고 건물을 파괴하였다.

이때 조한국(趙漢國), 강상중(姜相中)은 마산의 일본군 수비대와 연락되는 전화선을 끊어 놓았다. 오후 5시 40분경 함안으로 전화가 불통되자 비상 사태가 돌발한 것으로 짐작하고 마산 중포병 대대 병력 16명이 도착하여 현지 경찰과 주동자를 검거하였다. 이용우도 이때 체포되어 부산 지방 법원 마산 지청에서 2년 형을 선고 받았다. 이용우는 항소하였으나, 1919년 8월 15일 대구 복심 법원에서 항소가 기각되어 2년의 옥고를 치렀다. 고문의 후유증으로 1930년 6월 26일 32세로 병사하였다. 아들로 이원대가 있다.

[상훈과 추모]

1977년 대통령 표창, 1991년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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