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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200676
한자 密陽 朴氏
이칭/별칭 밀성 박씨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경상남도 함안군
집필자 류진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본관 밀양(密陽) - 경상남도 밀양시
입향지 우곡리 도음곡 -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도음리
입향지 여항면 두릉촌 - 경상남도 함안군 여항면 두릉리
세거|집성지 경상남도 함안군 여항면 외암리
세거|집성지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 강명리
세거|집성지 경상남도 함안군 산인면 내인리
성씨 시조 박언침(朴彦忱)
입향 시조 박한주(朴漢柱)|박경원(朴景元)|박경현(朴景玄)

[정의]

박혁거세를 원조로 하고, 박언침을 시조로 하며, 박한주·박경원·박경현 등을 입향조로 하는 경상남도 함안 지역의 세거 성씨.

[개설]

밀양 박씨는 원조(元祖) 박혁거세(朴赫居世)의 후손인 경명왕(景明王)의 세자 박언침(朴彦忱)이 밀성 대군(密城大君)에 봉해진 연유에서 본관을 밀양으로 하게 된 성씨이다. 이를 밀성 박씨(密城朴氏)라고도 한다. 밀양 박씨가 함안에 처음 정착한 것은 조선 전기이다. 한강(寒岡)정구(鄭逑)[1543∼1620]가 편찬한 『함주지(咸州誌)』 성씨 편에 밀양 박씨가 기록되어 있으며, 인물 편에는 (迃拙齋)박한주(朴漢柱)[1459∼1504], 완천당(浣川堂)박덕손(朴德孫), 광서(匡西)박진영(朴震英)[1569~1641] 등이 실려 있다.

[연원]

조선 중기 이후 함안에 세거해 온 밀양 박씨는 박세균(朴世均)을 파조로 하는 행산공파(杏山公派)와 박원광(朴元光)을 파조로 하는 영동정공파(令同正公派) 후손들이다. 행산공파 후손 박한주는 자가 천지(天支)요, 호는 오졸재이다. 고조할아버지는 행산(杏山)박세균이며, 아버지는 통사랑(通仕郞) 박돈인(朴敦仁)이다. 점필재(佔畢齋)김종직(金宗直)[1431~1492]의 문인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감찰·정언·전적 등을 지냈다. 1497년(연산군 3) 사간원 헌납이 되어 연산군의 실덕(失德)을 직간하였고, 임사홍(任士弘) 등의 간악함을 탄핵하였다. 무오사화 때 평안북도 벽동(碧潼)으로 유배되고, 1500년에 전라도 낙안(樂安)으로 이배되었다가 1504년 갑자사화 때 처형 당하였다. 중종반정으로 신원되고,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함안덕암 서원(德巖書院)·밀양예림 서원(禮林書院)·대구남강 서원(南岡書院)에 배향되었다. 오졸재박한주의 증손자 박구(朴球)는 함안 우곡리(牛谷里)에 살았는데, 효성이 지극하여『함주지』에 기록되었다.

영동정공파의 후손으로는 동천(桐川)박오(朴旿)와 박진영 부자가 가문의 중흥을 이루었다. 이후 완석당(完石堂)박형룡(朴亨龍), 자고당(紫臯堂)박상절(朴尙節), 만성(晩醒)박치복(朴致馥)[1824~1893] 등을 거치며 함안 지역 명문가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박오는 수우당(守愚堂)최영경(崔永慶)[1529~1590], 대소헌(大笑軒)조종도(趙宗道)[1537~1597], 황곡(篁谷)이칭(李偁)[1535~1600], 각재(覺齋)하항(河沆)[1538~1590] 등의 당대 학자들과 교유하였으며, 함안군 여항면 외암리여양 서원(廬陽書院)에 배향되었다. 박진영은 1569년 함안군 하리에서 박오의 아들로 태어났다. 정구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웠다. 한강정구, 여헌(旅軒)장현광(張顯光)[1554∼1637], 망우당(忘憂堂)곽재우(郭再祐)[1552~1617] 등과 함께 낙동강에서 뱃놀이하며 시문을 짓고 학문을 궁구하기도 했다. 1624년 이괄의 난 때 전공을 세웠으나 공신에 녹훈되지는 못하였다. 뒤에 해서 방어사로 나갔다가 오래지 않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판돈령부사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무숙(武肅)이다.

박형룡은 동명(東溟)김세렴(金世濂)[1593∼1646]과 미수(眉叟)허목(許穆)[1595~1682]을 종유하였다. 박상절박진영의 증손이고, 박형룡의 손자이다. 성호(星湖)이익(李瀷)[1681∼1763]의 문인으로 대산(大山)이상정(李象靖)[1710~1781] 등과 교유하였다. 1728년(영조 4) 무신의 난이 일어나자 격문을 지어 의병을 일으켰다. 저술로는 『기락편방(沂洛編芳)』·『이전작해(理全酌海)』·『만성보(萬姓譜)』 등이 있다. 만성박치복은 정재(定齋)유치명(柳致命)[1777∼1861]과 성재(性齋)허전(許傳)[1797~1886]의 문인이다. 남명(南冥)조식(曺植)[1501~1572]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청하였고, 시폐소를 올렸다. 1890년 『성재집』을 간행하고, 『성재연보』를 편찬하였다. 조선 후기 경상우도를 대표하는 학자로서 『대동 속악부(大東續樂府)』를 남겼다. 완천당박덕손은 충헌공파(忠憲公派) 박척(朴陟)의 후손이다. 정암(靜庵)조광조(趙光祖)[1482∼1519]와 동문이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으로 보덕(輔德)안중손(安仲孫), 탁영(濯纓)김일손(金馹孫)[1464~1498]과 더불어 영남 삼손(嶺南三孫)이라 일컬어졌다.

[입향 경위]

행산공파 파조 박세균의 현손인 오졸재박한주는 광주 안씨안효문(安孝文)의 딸과 결혼함으로써 당시 밀양부(密陽府)에서 함안 우곡리 도음곡으로 옮겨 와 살았다. 박원광을 파조로 하는 영동정공파는 절도공(節度公) 박경원(朴景元)과 참군공(參軍公) 박경현(朴景玄)이 무오사화를 당하여 벼슬을 버리고 밀양 구령리(龜齡里)[지금의 밀양시 수산읍]에서 함안군 여항면 두릉촌(杜陵村)으로 옮겨 와 살았다. 참군공 박경현의 5대손이 박진영이다. 충헌공파 박척의 후손인 박덕손은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함안군 하리 검암으로 내려와 우거하였으나 후일 인근의 고성군 구만면으로 이거하였다.

[현황]

오늘날 함안에 세거하고 있는 밀양 박씨는 행산공파와 영동정공파 후손들이 대부분이다. 박세균을 파조로 하는 행산공파 후손들은 여항면 외암리함안면 강명리 등지에 세거해 오고 있다. 박오와 박진영을 비롯한 영동정공파 후손들은 함안군 산인면내인리를 중심으로 세거해 오고 있다. 2000년 통계청 인구 조사 자료에 의하면, 함안군에 거주하고 있는 밀양 박씨는 1,535가구에 4,439명으로 파악되었다.

[관련 유적]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신음리에는 오졸재 박한주 비(迃拙齋朴漢柱碑)[1997년 12월 31일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261호로 지정]와 숭의재(崇義齋)가 있다. 무숙공박진영을 향사하기 위해 세운 여산 서당(廬山書堂)이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내서읍 중리에 있다. 2005년에 함안군 산인면밀양 박씨 영동정공파 종택에서 박진영의 유품을 포함한 약 1,200여 점의 고문서·고서적·책판 등을 국립 진주 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8.04.27 세대 서술 오류 수정 박상절은 박진영의 현손이고, 박형룡의 증손이다. -> 박상절은 박진영의 증손이고, 박형룡의 손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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