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201067
한자 德巖 書院
영어공식명칭 Deokam Private Confucian Academy|Deokam Seowon
분야 종교/유교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 봉성리 산 60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최정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617년연표보기 - 덕암 서원 설립
해체 시기/일시 1869년연표보기 - 덕암 서원 훼철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62년 - 덕암 서원 유허비 건립
최초 설립지 덕암 서원 -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 봉성리 산 60
현 소재지 덕암 서원 -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 봉성리 산 60지도보기
성격 교육 기관|서원

[정의]

조선 후기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 봉성리에 있었던 서원.

[개설]

덕암 서원(德巖書院)은 조순(趙純)[?~1398], 박한주(朴漢柱)[1459∼1504], 조종도(趙宗道)[1537~1597]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서원이다. 조순은 고려 말의 인물로 우왕(禑王)의 총애를 받았다. 조순은 왕명으로 요동을 공격할 때에 좌중군(佐中軍)에 임명되어 이성계(李成桂),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참전하였다. 위화도 회군(威化島回軍)에 반대하였고, 그 후에 낙향하여 두문불출하였다. 조선이 건국된 후 이성계는 조순의 지조를 찬양하여 하마비(下馬碑)를 건립하였다. 이것이 ‘조순 장군 비석’인데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검암리 586-1에 소재하고 있다.

박한주는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호는 우졸재(迂拙齋)이다. 성종(成宗) 때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중외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가 낙안의 적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조종도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호는 대소헌(大笑軒)이다. 명종(明宗) 때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한 뒤 천거로 출사하여 대소 관직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발발 이후 약 7년간의 전란의 과정에서 수차례 의병을 모집하였다. 1596년(선조 29)에는 함양 군수로 재임하였다. 이듬해 정유재란 때 안음 현감(安陰縣監) 곽준(郭䞭)과 함께 의병을 규합하여 황석 산성(黃石山城)을 수축하고 산성을 수호하던 중 왜장 가토[加藤淸正]가 인솔한 적군과 접전을 벌이다 전사하였다. 영조(英祖) 때 충의(忠毅)의 시호가 내려졌다.

[설립 목적]

덕암 서원은 지방 유림들의 공의로 조순·박한주·조종도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변천]

1617년(광해군 9)에 덕암 서원이 창건되었다. 이후 1868년(고종 6)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된 뒤 복원되지 못하고 유허비만 남아 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함안 조씨(咸安趙氏) 대소헌파(大笑軒派)의 후손인 조홍제(趙洪濟)가 1962년에 덕암 서원에 제향된 3인의 충절과 학덕을 기리기 위하여 경상남도 함안군 봉성리에 '덕암 서원 유허비(德巖書院遺墟碑)'를 건립하였다.

[현황]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 봉성리 덕암 마을 입구 서쪽에 악어등 산기슭 아래의 밭이 덕암 서원의 터로 전하고 있다. 덕암 서원이 훼철된 뒤에 복원되지 못하고 현재는 유허비만 남아 있다. 주변의 민가에서 초석 및 옛 기와 편들이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덕암 서원이 있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의의와 평가]

덕암 서원에서 배향했던 인물 중 한 명인 박한주의 공덕을 기리는 ‘우졸재 박한주 비(迂拙齋朴漢柱碑)’는 1997년 12월 31일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261호로 지정되었다. 비석은 현재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신음리 95번지에 있으며, 밀양 박씨(密陽朴氏) 한주공파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박한주는 무오사화 때 참형되었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 후에 신원이 복직되고 도승지(都承旨)로 증직되었다. 1629년(인조 7)에 여표비(閭表碑)와 비각(碑閣)이 건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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