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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200238
한자 朝鮮 時代
영어공식명칭 Joseon Period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함안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최정용

[정의]

1392년에서 1910년까지 조선 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의 함안 지역 역사.

[개설]

『여지도서(輿地圖書)』와 『함주지(咸州誌)』등을 보면 조선 시대 함안군은 김해진(金海鎭)의 관할이었으며, 『경국대전(經國大典)』의 경상도 외관직(外官職) 조에 보면 함안은 경상도 내에서 종 4품의 군수가 파견된 14곳 중의 하나였다. 『함주지』에는 당시 함안 지역 관할 하의 각 리와 그 소속 방(坊)의 수와 규모에 대하여 명기하고 있는데, 그 내용에 따르면 당시 함안에는 17개의 리와 148개의 방이 있었다. 조선 후기에 와서 함안의 리(里)는 면으로 개칭되는데 그 숫자는 조선 전기보다 2개 증가한 19개 면이었다.

[행정 구역]

역사상 함안과 관련되는 지명(地名)으로는 아시량(阿尸良), 아나가야(阿那伽倻), 아라가야(阿羅伽倻), 함안(咸安), 함주(咸州), 금라(金羅), 사라(沙羅), 파산(巴山), 안야국(安耶國) 등이 있는데, 이 중 현재도 사용되고 있는 함안이라는 이름은 신라 경덕왕(景德王) 16년(757)에 최초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함안과 칠원(漆原)이 통폐합되는 1906년 이전까지는 별도의 군현(郡縣)이었기 때문에 두 지명(地名)에 따른 유래와 변천 과정 역시 다르다.

『여지도서』와 『함주지』 등을 보면, 조선 시대 함안군은 김해진(金海鎭)의 관할이었다. 동쪽으로 창원과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25리[약 9.8㎞]이며, 서쪽으로 진주와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31리[약 12.17㎞]이다. 남쪽으로 진해와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27리[약 10.60㎞]이며, 북쪽으로 의령과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38리[약 14.92㎞]이다. 그리고 서울까지 864리[약 339.35㎞]로 9일 가는 거리이다. 북쪽으로 감영(監營)까지 180리[약 70.69㎞]로 2일 가는 거리이다. 서쪽으로는 병영(兵營)까지 90리[약 35.34㎞]로 하루 가는 거리이다. 남쪽으로 통영까지 130리[약 51.05㎞]로 하루 반 가는 거리이다.

함안은 조선이 건국된 후에도 고려 공민왕 22년(1373)에 지군사(知郡事)로 승격된 것이 그대로 유지되어 군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김정호(金正浩)가 작성한 『대동지지(大東地志)』에 세조 12년(1466) 군수(郡守)로 개칭했다는 기사가 있고, 『함주지』에도 임관(任官) 조의 통훈대부(通訓大夫) 유훈(柳訓)의 기록에, 세조 병술년인 12년(1466) 3월 군수로 개칭하였다는 내용이 있어 이때부터 군수가 파견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세조(世祖) 조에 그 내용이 사실상 완성되었던 조선 왕조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의 경상도 외관직 조에 보면 함안은 경상도 내에서 종 4품의 군수가 파견된 14곳 중의 하나이다. 연산군 11년(1505) 6월 도호부로 승격되지만 이듬해인 연산군 12년(1506) 9월 다시 군으로 강등되었다. 군수는 대체로 종 4품의 문관이나 무관이 임명되었다. 이들의 근무 연한은 『경국대전』에 의하면 1,800일이었다. 함안 군수로 임명되어 왔던 이들은 대체로 중앙 관직에 있던 사람들이었으며, 다른 지방의 지방관이었다가 부임해 온 경우는 드문 편이었다.

15세기 이후부터는 면(面)과 리(里)가 하나의 행정 단위가 되었다. 조선 전기 『경상도 지리지』나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구체적으로 이러한 면과 리를 행정 체계로 명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 뒤 편찬된 『경상도 속찬 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에는 이들의 편린이 나타난다. 함안군은 원우(院宇) 조에 산법 미리(山法彌里), 하계리(下界里), 남상리(南上里), 병화 곡리(竝火谷里), 서산 팔리(西山八里), 죽산리(竹山里) 등 6곳의 리가 나온다. 선조(宣祖) 때 간행된 『함주지』에는 당시 함안 지역 관할 하의 각 리와 그 소속 방(坊)의 수와 규모에 대하여 명기하고 있다. 그 내용에 따르면, 당시 함안에는 17개의 리와 148개의 방이 있었다.

규모가 가장 컸던 대산리(代山里)는 소속 방 수가 16개였고, 대곡리(大谷里)가 14개였다. 13개의 방을 가진 하리(下里)나 10개의 방을 가진 안도리(安道里)의 경우는 면적이 넓지 않으나 다른 리에 비해 방 수가 상대적으로 많은 것은 땅이 기름지거나 사람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함주지』에도 이 두 리가 토지가 비옥하고 사대부가 많이 살고 있다고 하였다.

조선 후기에 와서 함안의 리(里)는 면으로 개칭되며, 그 숫자는 조선 전기보다 2개가 증가한 19개 면이었다. 즉 17리(里) 중 하리(下里)가 산내리(山內里)와 산외리(山外里)로 분리되고, 대산리(代山里)가 내대산리(內代山里)와 외대산리(外代山里)로 분리되면서 19개 면이 된 것이다. 그런데 『영남 읍지』의 함안부 사례(咸安府事例) 등 일부 자료에는 18개 면만 기록하고 평광면(平廣面)이 제외되고 있다든지, 평광면 대신 구대곡(舊大谷)으로 기재되고 있기 때문에 1900년을 전후하여 평광면은 이웃 대곡면에 통합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148개였던 방이 후기에는 111개의 동으로 정리되었다. 리의 업무를 담당한 리정(里正)과 면의 업무를 담당한 권농(勸農) 및 이외에 집강(執綱)과 약정(約正)이 있어 지방민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수령을 보좌하면서 함안의 행정을 수행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공공건물로는 객사(客舍), 동헌(東軒), 향사당(鄕射堂), 군관청(軍官廳), 장관청(將官廳), 기고청(旗鼓廳), 인리청(人吏廳) 등이 있었다.

[정치와 군사]

『여지도서』와 『함주지』 등에는 함안의 성씨로 이(李)·조(趙)·채(蔡)·윤(尹)·유(劉)·정(鄭)이 등재되어 있으나, 여말 선초의 상황을 보여 주는 『세종실록지리지』에는 함안군의 토성을 여(呂)·오(吳)·서(徐)·박(朴)·조(曺) 5개로 적고 있다. 이들 토성 집단이 당시 함안 지역에서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수령을 보좌하여 지방 통치를 원활하게 하는 집단으로 향청(鄕廳)이 있었다. 향청은 유향소(留鄕所)의 후신으로 좌수(座首)와 별감(別監)이 임명되어 수령을 보좌하고 풍속을 교정하며 향리를 규찰하는 임무를 담당하였다. 함안에도 좌수 1명과 별감 2명이 임명되어 함안 군수를 보좌하고 있었다.

『여지도서』에 의하면 함안은 함안 군수를 중심으로 좌수 1명, 별감 2명, 군관(軍官) 50명이 있었다. 그리고 향리에 해당하는 계층으로 인리(人吏)라고 하여 29명이 있었다. 이 외에도 지인(知印)이 17명, 사령(使令)이 20명으로 관아의 심부름과 제반 사무를 보조하고 있었다. 이와 함께 관노(官奴)가 7명, 관비(官婢)가 6명이 배속되어 관아의 여러 일을 도왔다.

함안과 칠원의 군사 상황은 세조(世祖) 때 마련된 군사 제도인 5위와 진관 체제 하에서 살펴볼 때 5위인 의흥위(義興衛)·용양위(龍驤衛)·호분위(虎賁衛)·충좌위(忠佐衛)·충무위(忠武衛) 중에서 용양위의 전부인 김해 진관에 소속되었다. 5위는 각각 중·좌·우·전·후의 5부를 배속시켰다. 김해 진관은 창원의 우병사 휘하에 배속된 선산 진관, 성주 진관, 상주 진관, 진주 진관 등 5개 진관 중 하나이며 각각 1인의 영장이 파견되었다. 함안과 칠원은 우병사 휘하의 김해 진관에 있던 중영장의 지휘를 받았다. 『세종실록지리지』를 토대로 소속된 군정(軍丁)의 규모를 보면 함안의 군정은 시위군과 영진군으로 구성된 육군은 140명, 선군으로 구성된 수군은 370명이었고, 칠원의 군정은 육군 58명, 수군 225명이었다.

[사회와 경제]

『함주지』에 의하면 함안군의 총인구는 1만 5969명으로 남자 8,177명, 여자 7,792명이고, 제언(堤堰)은 8곳이며, 논밭의 규모는 6,283결 39부 4속이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조선 전기 함안에는 바닷고기를 잡는 어량이나 소금을 만드는 염소는 없었지만, 칠원에는 구산현 여음포에 어량이 1개 있었으며, 주로 대구어가 잡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구산현 남쪽에는 소금을 만드는 염소가 1개 있었다.

함안의 대표적인 농작물은 벼, 기장, 배, 대추였으며, 칠원의 대표적인 농작물은 벼, 조, 보리였다. 함안의 농경지 면적은 3,976결로서 18개 군현 가운데 상위에 속하였다. 칠원의 농경지 면적은 1,819결이었다. 함안의 농경지는 6분의 2가 논, 6분의 4가 밭이었다. 칠원의 농경지는 4분의 1이 논, 4분의 3이 밭이었다.

『함주지』에 수록된 1587년(선조 20) 무렵 함안의 농경지 규모는 크게 증가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의 3,976결에서 130여 년 만에 6,283결로 증가하였다. 논 1,731결, 밭 4,551결로서 여전히 밭농사 중심 지역이었다. 함안은 밭농사 농업 지역에 속하였고, 칠원은 밭농사 중심의 농업과 고기잡이와 소금 생산 등 수산업이 행해졌다.

『함주지』에 수록된 함안의 토산품으로는 공전에서 재배되었던 것으로 대나무, 옻나무, 마황, 왕골 등이 있었다. 대나무는 부채와 화살대를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옻나무는 옻칠에 사용되었으며, 일부는 공납으로 바쳤다. 마황은 한약재로 사용되었고, 왕골은 돗자리를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민가에서 많이 재배했던 것으로는 석류, 대추, 감, 밤, 매실 등이 있고, 옷감 재료로서는 모시가 재배되었다. 산에서 생산된 것으로는 벌꿀, 송이버섯, 자수정 등이 있었다. 벌꿀은 대곡리, 비리 곡리, 병곡리 등에서 많이 생산되었으며, 벼룻돌로 사용되던 자수정은 산익리에서 산출되었다. 강에서는 붕어, 잉어 등이 많이 잡혔는데, 남산·마륜·대산(大山)·대산(代山) 등에서 많이 잡혔다. 이러한 토산품은 『함안군 읍지(咸安郡邑誌)』(1832)에도 그대로 확인된다.

조선 후기에 형성된 함안과 칠원의 장시(場市)로는 함안의 5일장으로 평림장, 방목장, 궁북장이 있었다. 평림장은 내대산면에 있으며 끝자리 1일과 6일, 방목장은 함안읍성 동문 바깥에 있으며 끝자리 3일과 8일에 장이 섰고, 궁북장은 안도면에 있으면 끝자리 4일과 9일에 장이 섰다. 함안군이 필요로 했던 생선과 소금의 거래는 창원과 진해의 두 읍내장에서 이루어졌다. 칠원의 5일장으로는 읍내장과 우질포장이 있었다. 읍내장은 끝자리 3일과 8일, 우질포장은 끝자리 2일과 7일에 각각 열렸다.

함안관 내의 창고는 동창(東倉)·북창(北倉)·대동고(大同庫)·진휼고(賑恤庫)·서창(西倉) 등 5개이며, 봉수(烽燧)는 1곳이다. 역원(驛院)으로 춘곡역(春谷驛)과 파수역(巴水驛) 2곳이 있었고, 원은 6개가 있었다. 학교는 향교 1곳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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