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시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200237
한자 高麗 時代
영어공식명칭 Goryeo Period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함안군
시대 고려/고려 전기,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김광철

[정의]

고려 시대 경상남도 함안군 지역의 역사와 문화.

[개설]

고려 시대 함안 지역에는 함안군(咸安郡)과 칠원현(漆原縣) 두 행정 구역이 자리하였다. 함안군은 신라경덕왕(景德王) 대 군현 개편에서 현무현(玄武縣)과 의령현(宜寧縣) 두 고을을 거느린 주읍(主邑)이었고, 칠원현은 칠제현(漆隄縣)으로 불리면서 오늘날 창원시 지역인 의안군(義安郡)에 소속되어 있었다. 고려 건국 후 성종(成宗) 14년(995)의 10도제 하에서 함안군은 함주 자사(咸州刺史)가 파견되는 곳이었으나, 현종 9년의 군현 개편에서 칠원현과 함께 오늘날 김해시 지역인 금주(金州) 관할의 속읍(屬邑)이 되었다. 함안군은 명종(明宗) 2년(1172) 감무(監務)가 파견된 이래, 공민왕(恭愍王) 22년(1373) 고을 사람 주영찬(周英贊)의 딸이 명(明)나라 황실의 궁인(宮人)이 됨으로써 지군사(知郡事)가 파견되는 함안군으로 승격되었으며, 칠원현은 공양왕(恭讓王) 2년(1390)에 비로소 감무가 파견되었다.

[행정 구역]

고려 시대 함안 지역은 함안군과 칠원현으로 나누어져 금주(金州)[현 김해시]의 속읍으로 있었다. 신라 때까지 함안군과 칠원현은 지역의 소속 권역이 서로 달랐다. 함안은 오늘날 진주 지방인 강주(康州) 권역에 속하면서 주읍(主邑)으로 기능한 반면, 칠원은 오늘날 양산 지방에 해당하는 양주(良州) 권역에 있었던 의안군(義安郡)[현 창원시]의 속현(屬縣)이었다.

함안군은 신라경덕왕 16년의 군현 개편 때 현무현과 의령현 2개의 속읍을 거느린 주읍이 되었다. 현무현은 오늘날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 일대로, 본래 소삼현(召彡縣)이라 했던 것을 경덕왕 때 현무현으로 고쳤고, 고려에 들어와 함안의 소삼부곡이 되었다. 함안군의 이 같은 읍격(邑格)은 고려 전기까지 이어져, 성종 14년(995) 전국을 10도제로 개편할 때 함안군은 함주(咸州)로 승격되어 산남도(山南道)에 소속되고, 지방관으로서 자사(刺史)가 파견되었다. 그러나 현종 9년(1018) 전국적인 군현의 개편에서 함안군에는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고 금주의 속읍으로 편제되었다.

한편, 칠원현은 본래 칠토현이었는데 신라경덕왕 16년의 군현 개편 때 칠제현으로 개칭하여 의안군의 영현으로 삼았다. 고려 전기 칠원현으로 개칭하였고, 현종 9년의 군현 개편에서 의안군과 함께 금주의 속현으로 편제되었다.

고려 시대 함안군과 칠원현에는 특수한 행정 구역으로서 향(鄕), 소(所), 부곡(部曲) 등 부곡제 영역이 주로 군현의 경계 지역에 분포하고 있었다. 함안군에는 소삼 부곡(召彡部曲), 본산 부곡(本山部曲)[군 서쪽 20리], 감물곡 부곡(甘勿谷部曲)[군 북쪽 25리), 간곡소(杆曲所)[군 남쪽 18리], 지곡소(知谷所)[군 서쪽 37리], 추자곡소(楸子谷所)[군 남쪽 20리], 비리곡소(比吏谷所)[군 남쪽 27리], 손촌소(損村所)[군 서쪽 40리] 등 부곡 3곳과 소 5곳이 있었다. 칠원현에는 우질포향(亏叱浦鄕)[현 북쪽 25리]과 부곡 부곡(釜谷部曲)[현 남쪽 7리]이 영산현(靈山縣)과 합포현(合浦縣) 경계 지역에 분포하였다.

고려 시대 함안군과 칠원현은 이들 치소를 중심으로 주변에 도로와 교통 시설물이 들어서 있었다. 함안군의 경우 역참으로는 금주도 소속 31개 역 가운데 하나로 뒤에 춘곡역(春谷驛)으로 개칭된 번곡역(繁谷驛)이 군 서쪽 11리 지점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칠원현에는 창인역(昌仁驛)과 영포역(靈浦驛)이 각각 현 서쪽 7리 지점과 현 북쪽 21리 지점에 있었다.

[인구와 경제]

고려 시대 함안군과 칠원현의 인구와 경제 규모가 어떠했는지 이를 확인해 주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조선 전기에 편찬된 『경상도 지리지(慶尙道地理志)』(1425) 등 지리서를 통해 이를 추정해 볼 수밖에 없다. 『경상도 지리지』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따르면, 조선 전기 함안군의 인구는 732가구 6,687명으로 집계된다. 칠원현의 경우 337가구 1,331명으로 되어 있으나 인구는 남성만 집계된 것이라서 실제 인구는 그 배에 해당하는 2,600여 명 이상일 것으로 추정된다.

함안군의 경지 면적은 3,796결, 칠원현은 1,819결로, 이 가운데 논이 함안은 3분의 1 정도, 칠원은 4분의 1 이상으로 함안 지역의 논 비중이 높은 편이었다. 함안군이나 칠원현의 입지 조건에 따라 벼, 보리, 조, 기장 등이 적합한 재배 품종이었다. 함안의 경우 배와 대추 등 유실수도 경작되었다.

고려 시대 함안 지역도 조세와 역, 공물 부담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함안군과 칠원현의 주민 역시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군역을 부담하였는데, 이들 지역은 고려 시대 주현군(州縣軍)에 포함되어 군역을 부담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주현군 조직에서 함안과 칠원은 금주도(金州道)에 속하였고, 이곳에는 보승군(保勝軍) 188명, 정용군(精勇軍) 278명, 일품군(一品軍) 431명이 배치되어 있어서 이 가운데 일부를 함안과 칠원에서 교대로 근무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후기 사회의 변화]

고려 후기에는 속읍이었던 함안군과 칠원현에도 지방관이 파견되기 시작하였다. 함안군에는 명종 2년(1172) 감무가 파견되었으며, 칠원현에는 이보다 훨씬 뒤늦은 공양왕 2년(1390)에 파견되었다. 감무는 수령을 파견하지 못한 속(屬)·군(郡)·현(縣)과 향·소·부곡 등에 파견된 감찰적 성격을 지닌 임시 지방관이었다. 함안 지역 사회에도 감무가 파견됨으로써 속읍으로서의 지위를 벗어나 주읍으로 기능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함안군이 주읍으로 승격된 것은 공민왕 22년(1373)의 일이다. 이때 함안군에는 수령으로 지군사(知郡事)가 파견되었다. 함안을 주읍으로 승격시킨 배경에 대해서는 함안 출신인 함안 주씨(咸安周氏)주영찬의 딸이 중국에 들어가서 명나라 황제의 시희(侍姬)가 되어 총애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무인 집권기부터 시작된 농민 항쟁, 몽골 침입, 삼별초 항쟁, 일본 정벌, 그리고 왜구의 침입은 함안에도 영향을 미쳐 지역 사회의 변화를 불러 오고 있었다. 먼저 무인 집권기 농민 항쟁은 함안에서 직접 발생하지는 않았지만 인근의 김해, 밀양, 진주 등지에서 발생하고 있어서 함안 사회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여몽 전쟁이 종식될 무렵 발생한 삼별초 항쟁은 함안에도 영향을 미쳤다. 가까운 밀양 지역이 삼별초 호응 봉기의 중심지가 되고 있었으며, 인근의 합포[마산]와 김해가 그 세력권 하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삼별초 항쟁이 종식된 후 몽골의 내정 간섭이 본격화되면서 추진된 여원 연합군의 일본 정벌도 함안 지역 사회의 변화에 영향을 미쳤다. 일본 정벌의 전진 기지가 인근 합포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정벌군의 동원과 전함의 건조, 군량 확보 등 문제에서 함안 지역 사회도 벗어날 수 없었다.

고려 후기 왜구의 침입은 다시 한 번 함안 사회에 충격을 안겨 주었다. 충정왕(忠定王) 대부터 극성을 부리기 시작한 왜구의 침입은 이후 서남해 연안 지역은 물론 수도 개경까지 위협함으로써 국가 위기 상황을 조성하고 있었다. 함안 지역에 왜구의 침입이 직접적으로 미친 것은 상대적으로 늦은 시기인 우왕(禑王) 2년 말부터이지만, 이웃한 오늘날 마산 지역이 이미 충정왕 때부터 침탈당하고 있어 그 영향은 이때부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고려 후기 함안 지역 사회가 변화를 수반하는 가운데, 지역 재지 세력 중에 중앙 정계에 진출하는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본래 함안의 재지 세력인 토성으로 이(李)·조(趙)·채(蔡)·윤(尹)·유(劉)·정(鄭), 칠원의 토성으로 김(金)·윤(尹)·정(丁)이 있었는데, 이들 성씨 가운데 함안 조씨(咸安趙氏), 함안 이씨(咸安李氏), 칠원 윤씨(漆原尹氏) 등이 고려 후기에 들어와 관료를 배출하기 시작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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