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0739 |
---|---|
한자 | 趙性孚 |
영어공식명칭 | Jo Seongbu |
이칭/별칭 | 석여(錫汝),신산(信山)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강동욱 |
[정의]
근대 함안 출신의 학자.
[가계]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석여(錫汝), 호는 신산(信山). 시조는 고려 개국 벽상 공신(開國壁上功臣) 대장군 조정(趙鼎)이며, 조선단종조 생육신 어계(漁溪)조려(趙旅)는 드러난 조상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조증린(趙增麟)이고, 할아버지는 괴재(槐齋)조진탁(趙鎭卓)이다. 아버지는 죽양(竹陽)조필호(趙弼浩)이며, 어머니는 안양(安洋)의 딸 순흥 안씨(順興安氏)로 부덕(婦德)이 있었다.
[활동 사항]
조성부(趙性孚)[1867~1927]는 어릴 때 용모가 단정하고 자질이 남달랐다. 함안의 대유학자 만성(晩醒)박치복(朴致馥)[1824~1893]이 보고, “이 아이는 자라서 반드시 큰일을 할 것”이라고 칭찬하였다. 약관의 나이로 인산재(仁山齋)에서 서천(西川)조정규(趙貞奎)[1853~1920]에게 학문을 익혔다. 박치복과 조정규는 근기 남인(近畿南人)의 학맥을 이은 성재(性齋)허전(許傳)[1797~1886]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1897년(고종 34)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삼년상을 예법에 따라 치렀다. 어머니의 환갑 때는 색동옷을 입고 잔치를 베풀었다. 이웃의 어려운 사람들을 구휼하였으며 세태가 어지러워지자 동지들과 대산재(台山齋)에 들어가 계를 조직하고 강학을 하였다. 경술국치를 당해서는 통곡을 하였으며 이로부터 은둔의 뜻을 가졌다. 1918년 대산재를 중건해 일산(一山)조병규(趙昺奎)[1853~1920], 조정규 등 함안의 명유들과 강학을 하였다. 1927년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 『신산집(信山集)』이 있다.
[묘소]
묘소는 경상남도 함안군적남산(積南山) 신좌(申坐) 언덕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