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5A0102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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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화정동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신대광 |
이곳은 화정동으로 들어오는 입구이다. 이곳에서 시화호가 있는 서해안까지는 아주 먼 거리지만 옛날에는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한다.
이곳의 옛 지명은 ‘쑥께’라고 하는데, 이 지명에 대한 유래는 두 가지가 전한다. 먼저 ‘쑥께’라는 말은 고주물 초입을 가리키는 말로서, 이곳에 쑥이 많다고 해서 ‘쑥께’라고 불렸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쑥께가 있는 지역이 바닷물이 들어왔을 때 쑥 들어간 갯고랑 가장자리에 있다고 하여 ‘쑥께’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화정8교는 달미[현재 선부동]와 화정동 사이에 위치한 곳으로 조선 후기에 최참봉이란 사람이 처음 들어와 살았단다. 최참봉이 살던 집은 일제강점기 중엽 시흥시 수암동-거모동 간 도로확장공사 때 헐렸으며, 현재의 집들은 일제강점기가 끝날 무렵 지어졌다고 한다.
화정동의 옛 모습을 살펴보면, 지금의 마을 입구에 해당하는 ‘쑥께’[거리명은 ‘쑥개’]는 전해 오는 지명 유래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바닷가와 접해 있었다. 조선후기까지만 해도 바닷물이 고주물까지 들어왔기 때문에 지명에 쑥께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바닷물이 이곳 마을 입구까지 들어온 흔적은 ‘갯논’ 이나 ‘개논’ 등의 지명에서도 찾을 수 있다. 현재 마을 입구의 고가도로[영동고속국도] 밑에 있는 그곳이 바로 배다리 지역이다. 이곳에는 전통적인 방법으로 소금을 채취하던 화염(火鹽) 생산지가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화염은 동랑구지[현재 마을 아래쪽에 있는 와동]에서 가져온 배를 마을 입구에 정박해 놓은 뒤 실어갔다고 한다. 마을 어른 김연권 전 통장에 따르면 동랑구지와 배다리, 개논과 같은 지명은 화정동이 시흥시에서 안산시로 편입되면서[1995년 4월 20일] 사라졌다고 한다.
이렇듯 예전에는 화정동 입구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는데, 일제가 대륙 침략을 본격화할 무렵인 1937년, 수인선을 부설한 경동철도회사가 안산 지역을 관통하는 수원-인천 간 수인선 협궤열차 운행을 위해 바닷물이 하천 상류로 올라오지 못하게 서해 쪽 둑방을 막아 버렸다. 철도를 위해 바닷물을 막은 것이다. 그로 인해 예전에는 마을 아래 배다리나 동랑구지에서 배를 타고 서해안으로 나갈 수 있던 화정동의 바닷길이 막혀 버린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그때 화정동의 지형이 크게 바뀌었다고 한결같이 말하고 있다.
그런데 마을 어른들의 증언과는 달리 1939년 3월 30일자 『조선일보』를 보면, 이미 철도를 부설하기 전에 바닷가에 제방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제방 위에 놓인 철로 때문에 염수(鹽水)가 제방을 넘어 인근 농토에 스며들어 농작물이 피해를 입게 되었던 것이다.
이 일로 인해 마을 사람들과 경동철도회사 사이에 갈등이 빚어진 사건이 있었다. 이는 철도를 부설하면서 제방이 만들어져 바다로 나가던 길이 막혀 버렸다는 마을 사람들의 얘기와 달리, 그 전에 이미 제방을 쌓았던 것이 분명하다.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총독부는 조선을 좀 더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 새로운 지도를 제작하였다. 1916년에 제작된 지형도를 살펴보면 현재 안산의 화정천 옆에 있는 화랑저수지는 존재하지 않았고, 화정천을 통해 바닷물이 마을 입구까지 들어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마을에서 화정천을 따라 조금만 내려가면 널따란 갯벌이 있고, 갯벌 사이로 난 작은 수로를 통해 바닷물이 들어왔으며, 그 주변에 제방이 쌓여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