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201352
한자 阿羅伽耶- 加耶- 二人者-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함안군
시대 고대/삼국 시대/가야
집필자 남재우

[정의]

한국 고대사에서 가야에 속했던 여러 나라 가운데 한 나라이자, 가야 제국 중에서도 강력했던 아라가야의 문화사적 발달 단계에 대해 알아본다.

[개설]

아라가야(阿羅伽耶)는 발전 단계로 볼 때 전기와 후기로 나눌 수 있다. 전기는 중국의 역사서인 『삼국지(三國志)』에 안야국(安邪國)으로, 후기는 『일본서기』에 안라국(安羅國)으로 나타난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아라가야·아야가야(阿耶伽耶),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에는 아시량국(阿尸良國)·아나가야(阿那加耶), 『삼국사기』 열전에는 아라국(阿羅國) 등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광개토왕 비문(廣開土王碑文)」에는 안라(安羅), 『양직공도(梁職貢圖)』 백제국 사전 도경 조에는 전라(前羅)로 기록되어 있다.

[아라가야를 '영원한 2인자'라 부르기도 한다. 과연 그런가?]

아라가야가 속하였던 가야는 전기[기원 전후부터 4세기]와 후기[5세기부터 562년]로 나누기도 하는데, 가야를 연맹체로 보는 연구자들은 전기 가야 연맹과 후기 가야 연맹으로 나누고, 전자의 맹주국을 김해 가락국, 후자의 맹주국을 고령 대가야로 이해한다. 이러한 이유로 아라가야는 맹주국은 아니었지만 강력한 세력으로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2인자’로 부르기도 한다. 즉 아라가야가 가야 연맹 전체를 아우르는 맹주국은 아니었지만 가야 지역을 동서로 나눌 때는 서쪽, 남북으로 나눌 때는 남쪽의 중심 세력으로 보기도 한다.

가야를 연맹체로 보는 것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도 많다. 가야 지역에는 여러 나라가 존재하고 있었으며, 각국의 발전 과정과 멸망 시기는 달랐다. 또한 가야의 여러 나라가 김해 가락국, 고령 대가야를 중심으로 연맹을 맺은 근거도 명확하지 않다. 가야와 관려하여 남아 있는 기록들이 전기에는 김해 가락국, 후기에는 고령 대가야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그렇게 이해하고 있는 것 같으며, 또한 가락국과 대가야의 건국 신화가 연맹체의 근거가 되고 있을 뿐이다.

[아라가야는 2인자가 아니었다!]

아라가야는 가야 여러 나라 중에서도 선진국이었다. 맹주국이라 불리는 가락국의 기록은 전기에만 집중되어 있고 대가야는 후기에만 집중되어 있다. 하지만 아라가야는 전기에는 변진 안야국(弁辰安邪國)으로, 유력한 정치 집단의 하나로 『삼국지』에 기록되어 있고, 광개토왕(廣開土王)의 남정(400년)과 관련된 기록을 남기고 있는 「광개토왕 비문」에도 안라국이라는 이름으로 존재가 드러나 있다. 또한 『일본서기』의 6세기 대 기록인 「계체기(繼體紀)」와 「흠명기(欽明紀)」에 보이는 안라국에 대한 기록은 안라국의 발전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이렇듯 가락국, 대가야와 달리 아라가야의 존재를 알려 주는 기록으로 보아 아라가야는 가야 전 시기에 걸쳐 강력한 정치 집단으로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유적이나 유물 또한 아라가야의 정치적 발전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아라가야의 정치적 성장을 보여 주는 대형 고분군인 함안 말이산 고분군은 규모면에서도 고령의 지산동 고분군에 못지않다. 대형 고분이 말이산 정상부를 따라 위치해 있다.

그럼에도 아라가야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이유는 가야를 연맹체로 이해했던 결과였다. 전기 가야의 맹주국은 가락국, 후기 가야의 맹주국은 대가야로 설정함으로써 맹주국 중심으로 연구가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낙동강 유역의 개발 과정에서 대가야 지역인 고령과 김해 지역에 대한 발굴 성과가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아라가야에 대한 연구가 급진전되었다.

첫째, 1990년대 이후 아라가야 지역인 함안 지역에 대한 발굴 조사 성과가 축적되었다. 창원 문화재 연구소[현 가야 문화재 연구소]가 설립되면서 연차적으로 함안 지역에 대한 고분 발굴이 확대 실시되었다. 둘째, 『일본서기』에 대한 인식이 변화되었다. 『일본서기』의 「계체기」와 「흠명기」 기사에 대한 재인식은 이 시기의 『일본서기』에 자주 등장하는 아라가야에 대한 기록을 통하여 아라가야의 정치적 성장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셋째, 가야사를 연맹체로 이해하는 관점에서 벗어나 가야 각국의 개별적 발전 과정에 대한 연구가 진행된 것도 아라가야의 연구가 활성화되었던 계기가 되었다.

넷째, 지방 자치제 실시는 지방의 역사적 정체성에 대한 관심을 불러왔고, 이로 인한 지방사 연구는 아라가야 역사에 대한 이해의 폭을 확대하였다. 즉 함안 지역에서는 아라가야의 역사를 주제로 하는 심포지엄이 개최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로 인하여 가야사 연구가 김해 가락국과 고령 대가야 중심에서 벗어나 아라가야와 같은 가야 각국에 대한 연구를 활성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아라가야의 역사가 가야사의 주변부가 아니라 가야 사회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아라가야의 발전 과정]

1. 삼한 시기 아라가야

아라가야의 발전은 전체 가야 사회의 발전 과정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아라가야는 삼한 시기 변한에 속하였던 12개 나라 중 하나로서, 기원전 1세기 말쯤 지금의 칠원 지역을 제외한 함안 지역에 형성되었던 변진 안야국이었다. 변진 안야국 형성의 전 단계에서 보여 주는 함안 지역은 고인돌의 분포로 보아 대략 4개의 정치 집단이 존재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김해 지역의 구간(九干) 사회나 경주의 6촌(六村)과 같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위만 조선(衛滿朝鮮)의 몰락으로 인한 유·이민의 남하가 진한(辰韓)과 변한(弁韓)을 형성하게 하였고, 이러한 와중에 함안 지역에도 안야국이 형성되었다. 함안 지역에서 조사된 기원전 1세기 말쯤으로 추정되는 목관묘는 안야국의 형성과 관련지어 볼 수 있다.

안야국은 김해의 구야국(狗倻國)과 함께 변한 제국 중에서도 유력한 나라였음이 『삼국지』의 ‘가우호(加優呼)’ 기사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안야국은 청동기 시대 고인돌의 분포나 1~3세기 대 유적의 분포로 보아 가야읍·함안면 지역과 군북면이 중심 세력권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중에서도 가야읍이 그 이후의 유적으로 보아 안야국의 중심 읍락인 국읍(國邑)에 해당하는 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 포상 팔국 전쟁과 아라가야

변한 제국은 주로 중국 군현과의 교역, 즉 선진 문물의 수입을 통하여 성장하였으나 3세기 전반 후한(後漢)이 멸망하면서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변한의 여러 나라는 스스로의 성장 기반을 마련하기 위하여 전쟁을 일으키면서 새로운 발전 단계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것이 3세기 말쯤 사실로 보이는 포상 팔국(浦上八國) 전쟁이다. 포상 팔국 전쟁은 아라가야의 인근에 있었던 해안가의 골포국(骨浦國) 등 여덟 나라가 내륙으로의 진출을 도모하기 위하여 함안 지역과 벌였던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아라가야는 포상 팔국의 침입을 막아 냄으로써 정치적 성장을 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즉 4세기 대 함안식 토기의 분포권이 가야읍 지역과 군북면 지역을 벗어나서 확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포상 팔국 지역의 일부가 아라가야의 영향 아래에 놓이게 됨으로써 아라가야는 바다를 통한 교역로를 확보하게 되어 농업 외에 인근 국가와의 교역도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3. 광개토왕의 남정과 아라가야

400년 고구려광개토왕의 가야 지역 진출 과정을 보여 주는 「광개토왕 비문」에 세 차례 등장하는 ‘안라인 수병(安羅人戍兵)’은 아라가야가 이 전쟁에 직접 참여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고구려가 왜의 신라 침략에 대하여 신라를 지원하기 위하여 5만의 군사를 파견하였던 이 전쟁에 아라가야가 참여하였던 것이다. 이 전쟁에서 김해 지역의 임나가라(任那加羅) 등이 고구려의 침략을 받게 되어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는데, 아라가야는 전쟁 과정에서 오히려 고구려·신라와 연합함으로써 가야 지역에서 진행된 위기를 주체적으로 극복하여 나갔고, 오히려 정치적 성장의 계기로 삼았다. 5세기 전반 대부터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 함안 말이산 고분군아라가야가 정치적으로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다.

4. 아라가야의 정치적 성장

아라가야의 정치적 성장은 광개토왕의 남정이 이루어진 5세기 대부터였다. 5세기 대의 사실은 기록으로 전혀 남아 있지 않지만 고령의 대가야가 중국남제와 외교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라가야도 대가야에 견줄 수 있는 발전을 해 나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말이산 고분군의 조성이 이것을 대변하고 있으며, 함안의 전형적인 토기 유형인 화염문 투창 토기의 분포로 보아 아라가야의 영역이 확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칠원 지역이나 의령의 남부 지역과 창원 진동 일부 지역이 아라가야의 영역에 포함되었다. 함안 지역에 다수 분포하고 있는 산성은 아라가야의 확대된 영역을 방어하는 시설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영역의 확대는 아라가야의 정치적 발전을 가져왔다. 아라가야의 최고 지배자는 왕(王)을 칭하였고, 왕 아래 다수의 차한기(次旱岐)와 하한기(下旱岐)가 존재했던 것으로 보아 지배층이 분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배층의 분화는 아라가야의 정치적 발전의 한 단면을 보여 주는 것으로서, 아라가야가 가야 제국의 ‘형’이나 ‘아버지’로 불리며, 6세기 대 대외적 활동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음을 보여 주는 증거이다.

5. 가야 외교의 중심 아라가야

6세기 대 아라가야는 백제와 신라의 가야 지역 진출을 방어하는 데 가야 제국 중에서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백제의 가야 지역 진출을 묵시적으로 동조도 하였지만, 백제가 섬진강 하류인 대사[하동] 지역에 진출할 즈음에는 백제와 신라의 아라가야를 비롯한 가야 지역으로의 진출을 저지하기 위하여 아라가야 주도로 고당(高堂) 회의를 개최하기도 하고, 아라가야에 머무르고 있던 왜의 사신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아라가야는 가야 제국과 백제 사이에 541년과 544년 두 차례에 걸쳐 열린 사비 회의에 대가야·다라 등 7~8개 소국 대표들과 함께 참여하여 백제에게 가야 제국의 독립 보장과 신라의 가야 지역 공격에 대한 방비책을 요구하는 등 가야의 독자성을 유지하기 위한 끊임없는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이러한 아라가야의 대백제·신라에 대한 외교 정책은 백제와 신라의 가야 지역에 대한 끈질긴 진출 욕구 때문에 성공을 거둘 수 없었다. 이에 아라가야는 고구려와 몰래 통하여 고구려로 하여금 백제와의 전쟁을 벌이게 하였으나 예기치 않았던 신라의 지원으로 이 또한 실패하고 말았다.

더 이상 백제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된 아라가야는 백제의 군사적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즉 아라가야는 백제와 신라의 전쟁이었던 관산성 전투에 백제를 지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백제가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에 패배함으로써 가야 각국은 커다란 피해를 입게 되었다. 백제가 더 이상 가야 지역에 대한 관심을 둘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신라의 가야 지역 진출은 확대되었다. 결국 아라가야도 신라의 공격을 이겨 내지 못하여 560년쯤 멸망하고 말았다. 아라가야의 멸망은 가야 각국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고, 2년 뒤 대가야도 신라에게 정복되었다.

[아라가야도 고대 국가였다!]

한국의 고대사에서 고구려를 비롯한 백제와 신라는 중앙 집권적인 고대 국가 단계로 발전하였지만, 가야는 고대 국가 이전 단계인 연맹 단계에 머물러 삼국처럼 고대 국가로 성장하지 못하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에 한국의 고대 사회를 삼국 시대라고 부른다.

고대 국가의 형성은 정치적 지배자인 왕의 등장과 건국을 이념적으로 정당화할 신화의 출현을 그 지표로 삼기도 한다. 이 두 가지 조건을 갖춘 사회는 시간적 순서로 보아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이다. 가야의 모든 나라가 고대 국가로 발전하였다고 볼 수는 없다. 가야 각국 사이에는 정치적 발전 정도가 달랐고, 하나의 단일 정치 집단으로 볼 근거도 없기 때문이다. 백제에서 열린 두 차례의 사비 회의에 가야 제국이 독자적인 사신을 파견하고 있는 것 또한 가야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독자적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가야 각국 중에서 대가야와 아라가야는 정치적 발전이 다른 나라보다 선진적인 정치 집단으로서 고대 국가 단계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일본서기』에는 아라가야의 정치 발전 정도를 보여 주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이에 안라는 새로이 고당(高堂)을 짓고 칙사를 인도하여 올라가는데, 국주(國主)가 뒤따라 계단을 올라갔고, 국내 대인(大人)으로서 미리 고당에 오른 사람은 한두 명이었으며, 백제 사신, 장군 등은 뜰에 있음을 한스럽게 여겼다.”[『일본서기』권 제17, 「계체기」 23년(529) 3월]

위 글에서 국주는 아라가야 왕을 가리키며, 국내 대인은 국주 다음으로 언급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라가야 왕 다음가는 유력자였을 것이다. 대인이 국사와 관련된 중요 회의에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은 ‘국정 참여 집단’, ‘의사 결정 집단’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대인은 아라가야 왕권 체제에 복속된 지배 집단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아라가야는 국왕을 중심으로 대인과 한기(旱岐)들의 합의 체제로 국정을 운영하였고, 이것을 아라가야 내의 ‘제한기 회의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아라가야의 발전 정도를 ‘귀족 합의 체제’ 단계의 고대 국가로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고대 국가로의 발전은 유력 정치 집단이 전쟁 또는 교역을 통하여 주변부 정치 집단을 복속시킴으로써 시작되었던 만큼 아라가야도 이러한 발전을 거듭하면서 정치적 발전을 해 나갔다고 추정된다. 왕이 존재하였으며, 왕이 초월적인 능력을 가지지는 못하였지만 새롭게 복속된 수장층을 관료로서 편제화하며 국가의 중대사에 참여케 했던 것이다. 이들이 한기층이었던 것이다. 다만 아라가야와 대가야는 새로운 통치 규범과 이념으로서의 율령이나 불교를 수용하지 못함으로써 고구려를 비롯한 삼국 정도의 고대 국가 단계로 발전하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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