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200856
한자 趙龍奎
영어공식명칭 Jo Yonggyu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
시대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장혜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0년 12월 24일연표보기 - 조용규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9일 - 조용규 함안읍 만세 운동 주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8월 20일 - 조용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형 선고 받음
몰년 시기/일시 1944년 11월 15일연표보기 - 조용규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77년 - 조용규 대통령 표창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0년 - 조용규 건국 훈장 애족장 추서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3월 19일 - 조용규 함안읍 만세 운동 주도
출생지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
활동지 경상남도 함안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함안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조용규(趙龍奎)[1880~1944]는 아들 조을석(趙乙錫), 손자 조현제(趙鉉濟), 증손자 조인래(趙仁來)을 두었다. 조용규가 참여한 함안읍 만세 운동은 고종의 장례식과 독립 선언식에 참여하고 귀향한 조한휘(趙漢輝)·한종순(韓鍾淳) 등이 계획하였다. 함안읍 만세 운동의 실질적 지도자는 이희석(李喜錫)으로 안지호(安知鎬)와 함께 의거 준비를 지휘하였다. 조용규도 함안에서 독립 선언식을 강력히 주장하였는데, 3월 15일 지사들이 모여 협의한 후 조병흠·한관렬(韓灌烈) 등이 독립 선언서를 인쇄하고 한종순은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박노일(朴魯一)·김상집(金祥集)·조병대·백낙삼(白樂三)·안갑중 등은 군중을 동원하였다.

함안 장날이던 3월 19일 오후 1시경 비봉산 고천제를 시작으로 군중이 봉성리에 모여들었다. 오후 2시경 이희석이 독립 선언문 낭독을 끝내자 3,000여 명에 달하던 군중이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였다. 시위 군중은 함안 경찰 주재소로 몰려가 돌을 던지거나 몽둥이로 습격하였다. 마산 경찰 서장 기타무라[北村]와 함안 경찰서 순사 부장 오하야시[大林]에게 독립 만세를 부르게도 하였다. 또한 우체국으로 가서 기물을 파괴하고 함안 심상 소학교, 함안 공립 보통 소학교, 함안 공립 보통 학교, 등기소 등도 공격하였다. 당시 조한국(趙漢國), 강상중(姜相中)은 마산의 일본군 수비대와 연락되는 전화선을 끊었다. 오후 5시 40분경 함안으로의 전화가 불통되자 비상사태가 돌발한 것으로 짐작하고 마산 중포병 대대 병력 16명이 도착하였다. 파병된 병력과 현지 경찰이 합세하여 시위 주동자를 검거하였는데, 이때 조용규도 체포되었다. 1919년 8월 20일 대구 복심 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형이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77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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