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200851
한자 趙聖奎
영어공식명칭 Jo Seonggyu
이칭/별칭 문관(文寬),학산(學山)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사촌리 205
시대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고은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6년 7월 7일연표보기 - 조성규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20일 - 조성규 군북 시장 만세 운동 주도
몰년 시기/일시 1940년 9월 20일연표보기 - 조성규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68년 - 조성규 대통령 표창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0년 - 조성규 건국 훈장 애족장 추서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3월 20일 - 조성규 군북 시장 만세 운동 주도
출생지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사촌리 205
거주|이주지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사촌리 205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함안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서울의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하고 돌아온 조한휘(趙漢輝)·한종순(韓鍾淳) 등에 의하여 3월 19일 함안읍 만세 운동이 결정되었다. 조성규는 조상규(趙相奎)·조용효(趙鏞孝)·이재형(李在衡) 등과 3월 20일 군북 시장 만세 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들은 미리 태극기를 제작하고 인근 지역에 계획을 알리는 등 사전 준비를 하였다. 3월 20일 오전 9시 함안군 군북면 동촌리신창 야학교에서 만세 운동이 시작되어 군북 장터로 퍼져 나갔다. 오후 1시경 3,000여 명의 군중이 만세 운동을 전개하자, 현지 경찰과 마산 중포병 대대 병력들이 공포를 쏘며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오후 5시경에는 군중이 5,000여 명으로 늘어나 경찰 주재소로 나아갔다. 사태의 급박함을 느낀 일본 경찰이 시위대에 공포를 발사하고, 나아가 조준 사격을 하여 현장에서 21명이 순국하고 18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많은 군중이 무참히 구타당하고 체포되었다.

[가계]

조성규(趙聖奎)[1876~1940]는 자는 문관(文寬)이고, 호는 학산(學山)이다. 아들은 조용석(趙鏞錫)이고, 손자는 조형제(趙亨濟)·조순제(趙淳濟)·조금제(趙琴濟)·조평제(趙平濟)이다. 증손자로는 조승래·조흡래·조익래·조방래·조탁래·조기래·조열래·조부래·조효래·조혁래가 있다.

[활동 사항]

1876년 7월 7일 함안군 군북면 사촌리에서 태어났다. 도량이 크고 과묵하였으며, 순수하고 올바른 행동으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평소에 이웃의 조석규(趙碩奎), 조창규(趙昌奎), 조상규 등과 함께 나라 찾을 방법을 논의하였다. 3월 19일 함안읍 만세 운동에 참여하고 조경식(趙璟植), 조용효, 이재형 등과 군북 시장 만세 운동을 준비 점검을 위하여 피신하였다. 조성규는 전날 피신한 사람들과 더불어 1919년 3월 20일 군북 시장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3월 20일 오전 9시 함안군 군북면 동촌리에 있는 신창 야학교에서 50여 명의 학생들이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하자, 아침 일찍 장터에 나가 있다가 시위 군중과 함께 궐기하였다. 오후 5시경에는 시위 군중이 5,000여 명으로 늘어나자 일본 군경은 위협을 느끼고 공포를 발사하였다. 시위 군중은 격분하여 경찰 주재소의 유리창과 벽을 파괴하였다. 이에 일본 군경이 시위 대열에 조준 사격을 감행하고 많은 군중을 체포하였다. 조성규도 이때 체포되어 2년 형을 선고받아 옥고[집행 원부 1547호]를 치렀고, 고문의 여독으로 앓다가 1940년 9월 20일 74세로 작고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8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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