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원 윤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200678
한자 漆原 尹氏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경상남도 함안군
집필자 류진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본관 칠원(漆原) -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
세거|집성지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 운서리
세거|집성지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 용산리
세거|집성지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 용정리
세거|집성지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 유원리
세거|집성지 경상남도 함안군 칠서면 계내리
세거|집성지 경상남도 함안군 칠서면 신산리
세거|집성지 경상남도 함안군 칠서면 이룡리
세거|집성지 경상남도 함안군 칠북면 검단리
묘소|세장지 상포재(上浦齋) - 경상남도 함안군 칠서면 계내리
묘소|세장지 검단재(檢丹齋) - 경상남도 함안군 칠북면 검단리
묘소|세장지 구혜재(九惠齋) - 경상남도 함안군 대산면 구혜리
묘소|세장지 유원재(柳原齋) -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 유원리
성씨 시조 윤시영(尹始榮)

[정의]

윤시영을 시조로 하고 칠원을 본관으로 하는 경상남도 함안 지역의 토착 세거 성씨.

[개설]

칠원 윤씨는 윤시영(尹始榮)을 시조로 하여 신라 시대부터 함안 칠원(漆原)에 토착 세거한 성씨이다. 칠원은 본래 신라 칠토현(漆吐縣)인데 경덕왕 때 칠제(漆隄)로 바뀌었다가 고려 초에 칠원으로 개칭되었다. 1895년(고종 32) 군으로 승격되었다가 1906년 함안군에 병합되었다.

[연원]

신라 태종 무열왕 때 태자태사(太子太師)를 지낸 윤시영을 시조로 한다. 그러나 판태사국사(判太史局事)를 지낸 아들 윤황(尹璜) 이후의 계대(系代)가 실전(失傳)되어, 고려조에 칠원현(漆原縣)의 호장보윤(戶長甫尹)을 지낸 중시조 윤거부(尹鉅富)를 1세조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 오고 있다. 이후 역대에 많은 뛰어난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충의공윤길보(尹吉甫)는 고려조에 삼중대광 첨의찬성사를 역임하고 구성군(龜城君)에 봉해졌다. 그 아들 5형제 충효공윤환(尹桓)[?∼1387], 대언공윤자(尹樜), 칠성군윤장(尹樟), 사윤공윤화(尹樺), 부원군윤공(尹椌) 등은 각기 5파의 파조가 되었다.

충효공 윤환은 칠원백(漆原伯)에 봉해지고 문하시중을 지냈다. 다섯 왕을 섬기는 동안 세 번 재상을 지냈으며, 고향에 내려가 있을 때는 가재를 털어 기근을 당한 빈민들을 구제하였다. 정경공(貞景公)윤저(尹抵)[?∼1412]는 조선 개국 후 상장군에 이르렀으며, 제2차 왕자의 난 때 태종을 도와 좌명삼등공신(佐命三等功臣)에 책록되었다. 그 후 찬성사(贊成事)에 오르고 칠원군(漆原君)에 봉해졌다. 윤자당(尹子當)[? ~ 1422]은 태종 때 박포(朴苞)의 난을 토벌하여 추충분의 익대좌명공신(推忠奮義翊戴佐命功臣)에 녹훈되고 보국숭록대부 칠원 부원군(漆原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정평(靖平)이다. 그 아우 윤자량(尹子良)도 태종 때 홍문관 대제학과 한성 판윤을 지냈으며,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양성당(養性堂)윤지(尹志)는 세종 때 김종직(金宗直)[1431∼1492]·서거정(徐居正)[1420∼1488] 등과 함께 집현전에 들어가 『치평요람(治平要覽)』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문종 때 청백리에 선정되고 대사간(大司諫)에 제수되었다.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사직하였다.

지퇴당(止退堂) 윤석보(尹碩輔)[?∼1505]는 성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호당(湖堂)에 들어갔으며, 홍문관 직제학과 대사간을 역임하였다.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지금의 황해도 금천(金川)에 유배(流配)되어 그 이듬해 졸하였다. 청백리에 녹선되고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윤석보의 아들 송월당(松月堂)윤풍형(尹豊亨)은 강원도 관찰사와 부제학을 역임하였다. 윤석보의 증손 윤탁연(尹卓然)[1538~1594]은 선조 때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으로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형조와 이조 판서를 지냈다. 1591년에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에 책록되고 칠계군(漆溪君)에 봉해졌다. 임진왜란 중 함경도 도순찰사로 시국 타개에 노력하던 중 순직하였다. 저서에 『계사일록(癸巳日錄)』이 있으며, 시호는 헌민(憲敏)이다.

[입향 경위]

칠원 윤씨는 칠원의 토착 사족으로 추정된다. 시조와 그 직손들의 묘역이 모두 칠원에 있으며, 『칠원 윤씨 족보』의 시조 탄생 설화에도 시조 이전부터 이미 칠원에 거주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 내용에 "칠원현에 살던 윤씨(尹氏)의 부인 태몽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아이 이름을 시영(始榮)으로 하라고 하여 그대로 이름을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황]

2000년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전국의 칠원 윤씨는 5만 4263명이며, 이 가운데 함안에는 127가구에 34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칠원 윤씨는 6개 파가 주를 이루고 있다. 충의공윤길보의 다섯 아들을 각기 그 파조로 한 충효공파·대언공파·칠성군파·사윤공파·부원군공파와 윤계유(尹繼葇)를 파조로 하는 대장군공파이다. 충효공파 윤환의 자손은 충청남도 청양과 경상남도 거제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대언공파 윤자의 후손은 초계·장흥·칠원·서울·제천·화성 등지에 모여 살아왔다.

사윤공파 윤화의 후손은 전라북도 부안 등지에, 부원군공파 윤공의 후손은 경상남도 거제와 전라남도 순천·벌교·고흥 등지에 세거해 오고 있으며, 대장군공파의 후손은 충청남도 보은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오늘날 함안군 칠원 일대에 세거하고 있는 칠원 윤씨는 대언공윤자의 증손으로 대사간을 지낸 양성당윤지의 후손들이다. 함안군 칠원읍운서리·용산리·용정리·유원리칠서면계내리·신산리·이룡리칠북면검단리 등지에 살고 있다.

[관련 유적]

경상남도 함안군 칠서면 계내리에 시조 태사공윤시영의 묘소와 홍포 서원(鴻浦書院)이 있다. 홍포 서원은 충효공윤환·정평공윤자당·양성당윤지·지퇴당윤석보·헌민공윤탁연을 제향하기 위해 1782년(정조 6) 용화산 기슭에 창건하였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1980년 현재의 위치에 중건하였다. 원래 서원 터에는 유허비가 남아 있다. 이 밖에 경상남도 함안군 칠서면 계내리에는 시조묘 재사(齋舍) 상포재(上浦齋)가 있으며, 여타 문중 재사로 경상남도 함안군 칠북면 검단리에 검단재(檢丹齋), 경상남도 함안군 대산면 구혜리에 구혜재(九惠齋),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 유원리에 유원재(柳原齋) 등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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