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야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200325
한자 勞動 夜學
영어공식명칭 The Labor Night School
이칭/별칭 노동 야학교,야학교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경상남도 함안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승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23년~1937년연표보기 - 노동 야학 설립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함안 지역에 있었던 노동 야학.

[개설]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전후한 시기 함안 지역에는 다수의 사립학교들이 설립, 운영되고 있었다. 1904년 무렵 건립된 경명 학교(儆明學校), 1904~1905년 사이 설립된 안신 학교(安信學校) 등과 같이 교회에서 설립한 학교들과, 비슷한 시기 군북면 덕대리 남단 동촌리에 세워진 신창(新昌) 야학교, 1906년 10월 향토의 선각자들에 의해 건립된 사립 보흥(普興) 학교[현 칠원 초등학교], 1909년 7월 세워진 사립 찬명 학교[현 함안 초등학교], 여항면에 있었던 동명 학교(東明學校) 등이 그 대표적인 학교들이었다.

이 학교들은 대개 실력 양성론에 입각하여 학생들의 민족의식 고취에 앞장섰다. 그 결과 경명 학교이령 교회(二靈敎會)를 중심으로 일어난 칠북면 이령리연개 장터 만세 운동에서 선도적 역할을 하였고, 신창 야학교군북면 만세 운동 초기에 중요한 장소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여항면에 있었던 동명 학교 교사들은 유림들과 함께 함안읍 만세 운동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처럼 한말과 일제 강점기 초 함안 지역에 건립되었던 근대 학교들은 민족 운동의 중요한 배수지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이 학교들은 3·1 운동 이후 일제의 소위 문화 통치 실시 및 공립 보통학교[현 초등학교] 체제 강화로 인해 사라지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정규 교육의 혜택을 받을 수 없었던 일반 대중들 및 그 자녀들을 위한 교육 기관으로서 역할을 담당했던 노동 야학교들이 출현하게 되었다.

[설립 목적]

1920년대 함안 지역에는 각 읍·면을 중심으로 10개의 보통학교가 운영되고 있었다. 그러나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 있던 일반 대중과 그 자녀들은 값비싼 수업료 때문에 공립학교에 진학을 할 수가 없었다. 이에 각 지역의 청년 단체들과 지역 유지들이 근로 대중 및 무산 아동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다수의 노동 야학교를 설립하였다.

[변천]

3·1 운동 이후 무산 아동들과 근로 대중에 대한 교육에 적극 앞장섰던 것은 함안 청년회였다. 함안 청년회는 1923년 1월 함안 공립 보통학교 교사를 빌려 일반 부인 120명과 남자 노동자 70명 등을 대상으로 일본어와 산술을 가르치는 노동 야학교를 개설하였다. 그리고 노동 야학교의 경비 마련을 위해 소인 극단(素人劇團)을 조직하고 군내 공연을 하면서 벌어들인 입장료 수입과 후원금을 학교 경비에 충당하기도 했다. 1926년 2월에는 노동 야학교의 학예회도 개최하였다. 당시 함안 청년회는 많은 주민들의 학예회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밤 8시에 제등 행렬을 진행했고, 여자반의 음악 무대도 열었다. 한편 여항면 외암리에는 함여(咸餘) 노농 상조회가 1924년 2월에 설립한 노동 야학이 운영되고 있었는데 일반 노동자 70여 명이 수업을 받았다. 이외 1925년 11월에는 함안 구락부가 무산 자녀들 위한 노동 야학을 설립하고 국어, 산술, 일어 등을 가르쳤는데 입학 아동은 150여 명이었다.

1927년 6월~9월에 경상남도 함안에 있었던 대표적 노동 야학으로는 함안면 북촌동의 함안 노동 야학, 함안 여자 야학, 태산(台山) 노동 야학, 함안면 대산리의 대산(大山) 노동 야학, 동지산(冬只山) 노동 야학, 여항면(艅航面) 외암리(外巖里)의 동명(東明) 노동 야학, 가야면 광정리(廣井里)의 백산(栢山) 노동 야학, 말산(末山) 노동 야학, 군북면 동촌리의 동창(東昌) 야학, 함안 소작 조합에서 각 리에 지부를 설치하여 문맹 타파와 농민 훈련을 목적으로 개설한 노동 야학 등이 있었다. 이외 노동 야학교는 아니지만 300여 명의 학생이 다니는 한문 서당 25개도 있었다.

1927년 당시 함안에는 이와 같은 10여 개의 노동 야학이 운영되고 있었으나 빈곤한 일반 대중들과 그 자녀들에게는 교육의 기회가 여전히 부족하였다. 그래서 1920년대 후반에도 많은 노동 야학들이 세워지게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1929년 12월 대산면 대사리(大沙里)에서 지역 유지들이 도남재(道南齋)를 수리하여 무산 아동 30여 명을 대상으로 개설한 노동 야학과 1930년 9월 군북면 소포리에서 설립된 노동 야학 등이 있다. 이외 설립 시기는 확인되지 않지만 1932년 4월 무렵 대산면 부목리(富木里) 야학교 등도 운영되고 있었다.

한편 일제는 1930년대 들어서면서 각종 사회 운동이 격렬해지고 다양한 노동 야학교 교사들 중 상당수가 사회 운동가로서 활동하고 있음에 주목하여 1932년부터 노동 야학 설립을 허가제로 변경하였다. 그 결과 많은 노동 야학교들이 일제에 의해 폐교되고 많은 노동 야학교 교사들이 일제에 검거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었던 근로 대중들의 배움에 대한 욕구는 계속되었고, 노동 야학 또한 지속적으로 생겨났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는 1933년 5월 군북면 덕대리노동 야학, 1937년 2월 군북면 소포리의 소포(小浦) 야학 등의 설립을 꼽을 수 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일제 강점기 함안 지역에 설립된 노동 야학은 경제적으로 빈곤한 일반 대중과 그들의 자녀들을 대상으로 무상 교육을 실시하였다. 수업 과목은 주로 국어, 일본어, 산술 등이었다. 노동 야학교의 경비는 대개 지역 유지들의 기부금과 찬조금 등으로 운영되었다.

[현황]

함안 지역의 노동 야학은 1927년 6~9월에 함안읍, 군북면, 가야면, 여항면 등에서 11개가 운영되고 있었다. 이후 1932년 일제가 노동 야학교 운영과 학교 설립에 대한 허가제를 실시함에 따라 기존의 노동 야학교들이 대부분 폐쇄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3년 5월 덕대리노동 야학, 1937년 군북면 소포리의 소포 야학 등의 설립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노동 야학이 새롭게 설립, 운영되기도 하였다.

[의의와 평가]

함안 지역 노동 야학은 일제 강점기에 경제적 어려움으로 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던 일반 대중들과 그 자녀들에게 무상으로 배움의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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