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영찬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200288
한자 周英贊
영어공식명칭 Ju Yeoungcha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남도 함안군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김광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1373년 7월 - 주영찬 판선공시사로 명나라 파견
활동 시기/일시 1373년 9월 - 주영찬 밀직부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373년 10월 17일 - 주영찬 하정사로 명나라 파견
몰년 시기/일시 1373년 11월 5일연표보기 - 주영찬 사망
출생지 경상남도 함안군
성격 외교 사신|문신
성별
본관 함안
대표 관직 밀직부사

[정의]

고려 후기 함안 출신의 문신이자 외교 사신.

[활동 사항]

주영찬(周英贊)[?∼1373]은 1373년(공민왕 22) 7월 판선공시사로서 천추절(千秋節)을 축하하기 위해 명나라에 파견되었다. 이때 제주(濟州)의 목호(牧胡) 초홀독불화(肖忽禿不花)가 바친 말 19필과 나귀 2필을 진상하게 하였다. 주영찬을 사신으로 파견한 것은 그의 딸이 원나라에 들어갔다가 명나라 병사들에게 사로잡힌 뒤 궁인(宮人)으로 뽑혀 황제에게 총애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사신으로 다녀온 뒤인 9월 밀직부사로 승진하였다. 같은 해 10월 17일 공민왕(恭愍王)이 그를 다시 하정사로 임명하고, 명나라로 가서 진정표(陳情表)와 사은표(謝恩表)를 명 황제에게 올리게 하였다. 이때 판선공시 우인열(禹仁烈)도 함께 가서 말 24필과 노새 2필을 바치고, 김잠(金潛)·송문중(宋文中)·조신(曺信) 등도 과거 응시자로서 따라가도록 했다. 그런데 11월 5일 영광 자은도에서 배가 좌초되어 주영찬, 김잠, 조신은 모두 익사하고, 우인열과 송문중만 살아 돌아왔다. 당시 38명이 익사하고 가지고 가던 예물과 말들은 모두 유실된 것으로 전한다.

주영찬의 익사로 11월 28일 밀직부사 장자온(張子溫)을 다시 사신으로 파견하였고, 이듬해 2월에도 밀직부사 정비(鄭庇)와 판사 우인열을 명나라로 파견하여 신년 하례를 하고, 육로로 조공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하는 표문을 올렸다. 그 표문에서 공민왕은 “당시 주영찬은 폐하의 부름을 받은 데다 겸하여 예물을 바치는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었습니다. 생사는 운명에 매인 것이라 미리 알 수 없다고 하더라도 돌이켜 보면 저의 사려가 깊지 못해 그러한 일이 발생했으니 참으로 폐하께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앞서 정료위에서 육로의 통행을 막지 않았더라면 어찌 이번 같은 실책이 있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먼 나라를 배려하시는 인덕과 도량을 더욱 넓히셔서, 충성을 바치려다가 노상 어려움에 부딪치는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또한 제후로서의 의무를 지키려다가 그저 허둥대기만 하는 저의 사정을 살펴 주십시오. 앞으로 보고나 건의할 일이 있을 때 편리한 육로를 이용할 수 있게 허락해 주시면, 더욱 제후로서 충성을 다할 것이며 항상 폐하의 만수무강을 축원하겠나이다.”라고 하여 당시까지 막혀 있던 명과의 육로 통행의 길을 트는 계기로 삼고자 하였다.

주영찬은 함안 주씨(咸安周氏)의 시조로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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