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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200682
한자 忠臣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함안군
집필자 김광철

[정의]

경상남도 함안 지역에서 나라와 임금을 위하여 충성을 다한 신하.

[개설]

전근대 함안과 칠원의 충신 인물들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 관찬 지리서와 두 지역의 각종 '읍지(邑誌)'의 인물조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함주지(咸州誌)』[1587]에서부터 『함안군 읍지(咸安郡邑誌)』[1899]나 『칠원군 읍지(漆原郡邑誌)』[1899]에 이르기까지 함안 관련 각종 지리서의 인물 기록에서 효자나 열녀의 경우는 이를 서술 항목으로 설정하여 소개하고 있는 반면, 충신의 경우는 『여지도서(輿地圖書)』[1757~1765]와 『교남지(嶠南誌)』[1940]를 제외하면 서술 항목을 독립시키지 않고 인물조에 묶어 서술되고 있다.

『교남지』 함안군과 칠원현 충의조에 수록된 인물은 함안군이 43명, 칠원현이 5명으로 모두 48명이 집계된다. 『교남지』에 실려 있는 충신 인물들을 기준으로 이전 읍지 등 지리서에 수록된 충신 인물들은 『함주지』에 3명, 『여지도서』에 9명, 『경상도 읍지(慶尙道邑誌)』[1832] 중 「함안군 읍지」에 33명, 「칠원현 읍지」에 1명, 『영남 읍지(嶺南邑誌』[1871] 중 「함안군 읍지」에 23명, 「칠원현 읍지」에 2명 정도이다.

읍지에 반영된 함안 지역 충신들은 조선 건국 후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킨 인물들, 조선단종(端宗)의 복위를 위해 충절을 지킨 생육신(生六臣),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시기 순절하거나 공을 세운 인물들, 인조 초 이괄(李适)[1587∼1624]의 난 진압에 참여한 인물, 병자호란·정묘호란에 참전하여 공을 세운 인물, 영조 대에 발생한 이인좌(李麟佐)[1695~1728]의 난[무신난] 진압에 참여한 인물 등 여섯 유형이 있다.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킨 인물]

조선 건국 후 고려 왕조를 지키려 했거나 벼슬을 하지 않고 충절을 지킨 인물로 조순(趙純)[?∼1398], 금은(琴隱)조열(趙悅), 모은(茅隱)이오(李午) 등이 있다. 조순은 요동을 정벌할 때 위화도에 이르러 이성계(李成桂)가 회군하려 하자, "번국(藩國)이 상국(上國)을 침범하는 것도 불가한 일이지만, 왕명을 듣지 않고 급히 회군하는 것은 더욱 좋지 않은 일이다."라고 하며 회군에 적극 반대하였다. 끝내 회군이 결행되자 조순은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나오지 않았다. 조선 건국 후 이성계가 그를 여러 번 불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자, 특명으로 그의 집 앞에 하마비(下馬碑)를 세워 존경의 뜻을 표했다. 1634년(인조 12) 덕암 서원(德巖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조열은 본관이 함안, 호는 금은으로 판도판서(判圖判書) 조천계(趙天啓)의 아들이다. 고려공민왕 때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역임하면서 판서 성만용(成萬庸), 평리(評理) 변윤(卞贇), 박사(博士) 정몽주(鄭夢周)[1337∼1392], 전서(典書) 김성목(金成牧), 대사성(大司成) 이색(李穡)[1328∼1396] 등과 교유하였다. 고려 말 벼슬을 버리고 함안으로 낙향한 후, 뒷날 만은(晩隱)홍재(洪載)가 벼슬을 버리고 삼가(三嘉)로 퇴거하자 모은이오와 함께 왕래하면서 시사(時事)를 논하였다. 고려가 멸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세 사람이 모여 울면서 비가(悲歌)를 부르니 당시 사람들이 이를 맥수(麥秀), 채미(採薇)의 비가와 비유하였다. 후인들이 그 의리를 흠모하여 운구 서원(雲衢書院)을 지어 봉향하였다. 문집으로 『금은 실기(琴隱實記)』가 있다.

이오는 본관이 재령(載寧)이며, 호를 모은이라 하였다. 할아버지는 상장군 이소봉(李小鳳), 아버지는 종부령(宗簿令) 이일선(李日善), 형이 지평(持平)을 역임한 이신(李申)이다. 이오는 공민왕 대에 성균관 진사 시험에 합격한 후, 고려 말 포은(圃隱)정몽주가 살해당하고 형 이신이 유배 후 사망하는 등 고려 멸망이 가시화되자 여러 동료들과 함께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갔다가 남쪽으로 내려와 함안 모곡(茅谷)에 은거하였다. 여기에서 조열, 홍재 등과 교유하면서 고려가 멸망하자 슬픈 노래를 불러 고려에 대한 충절을 표하였다.

이오는 고려가 망하자 절의를 지키기 위하여 자신이 은거한 모곡의 집터를 '고려동(高麗洞)'이라고 하였다. 그는 자신이 고려의 백성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동네 둘레를 토담으로 쌓고, 담 밖은 조선의 영토이지만 담 안은 고려의 백성이 사는 고려의 땅이라고 하였다. 조선태조는 이오를 여러 번 불렀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이오는 그의 아들에게, "내가 어찌 신왕조에서 벼슬을 할 수 있겠는가. 내가 죽은 후에는 절대로 신왕조에서 주는 벼슬 이름은 사용하지 말고 내 신주도 이곳 고려동 담 안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겨가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단종 복위를 위해 충절을 지킨 인물]

조려(趙旅)[1420~1489]의 본관은 함안, 자는 주옹(主翁), 호는 어계은자(漁溪隱者)이다. 공조 전서 조열의 손자이며, 증사복시 정(贈司僕寺正) 조안(趙安)의 아들로 1420년(세종 2) 경상남도 함안에서 출생하였다. 조려는 1453년 성균관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으며, 국자감에 입학하여 학문 연구를 하던 중, 1455년 수양 대군이 조카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즉위하자, "왕위를 찬탈한 수양 대군을 임금으로 섬길 수 없다."고 하여, 폐위된 단종에 대한 충성과 의리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함안 군북으로 낙향하였다.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자 강원도 영월을 방문하여 수시로 단종의 안부 인사를 전하였다. 1457년 금성 대군과 이보흠(李甫欽)[?~ 1457] 등이 거듭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실패하고, 단종이 사사(賜死)를 당하자 단종의 넋을 공주동학사(東鶴寺)에 모신 후 함안으로 돌아와 서산 아래에 은거하였다. 사람들은 조려가 머무르던 서산을 백이산(伯夷山)이라 불렀다. 단종 승하 후 3년간 상복을 입고 삼년상을 치렀고, 1489년 70세에 세상을 떠났다.

1698년(숙종 24) 단종이 왕으로 복위되자 이조 참판에 증직(贈職)되었다. 1701년(숙종 27) 1월 영남의 유생 신만원(辛萬元) 등이 조려를 원호(元昊), 김시습(金時習)[1435∼1493] 등과 함께 표창하도록 건의하였다. 1703년 경상도 유생 곽억령(郭抑齡) 등이 상소를 올려 성삼문(成三問)[1418~1456], 박팽년(朴彭年)[1417~1456] 등 사육신의 예에 따라 생육신인 조려 등도 사당을 세워 제향하도록 조정에 건의하였다. 이 해 11월에 정부는 포증(褒贈)하고,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웠다. 1706년 생전에 기거하던 백이산 아래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에 사당을 세워 김시습, 이맹전(李孟專)[1392~1480], 원호, 남효온(南孝溫)[1454∼1492], 성담수(成聃壽)와 함께 제향하였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순절하거나 공을 세운 인물]

함안의 충신 인물 가운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순절했거나 공을 세워 충신으로 평가된 인물이 가장 많았다. 『함안군 읍지』 등 지리서에 수록된 이 시기 충신 인물은 함안 출신이 32명, 칠원 출신이 3명으로 모두 35명이었다.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함안 지역에는 오운(吳澐)[1540∼1617], 이정(李瀞), 안희(安憙)[1551∼1613], 안황(安璜), 조붕(趙鵬), 이령(李伶), 이숙(李潚), 조단(趙坦), 조방(趙垹)[1557∼1638], 조준남(趙俊男), 조응도(趙凝道)[?∼1597], 정구룡(鄭九龍), 조신도(趙信道), 조민도(趙敏道), 조종도(趙宗道)[1537~1597], 박진영(朴震英)[1569∼1641], 이휴복, 이집(李楫), 황경헌(黃景憲), 이만성(李晩成), 방흥(方興), 이분형(李賁亨), 이명서(李明恕), 이명념(李明念), 이인(李寅), 이명여(李明悆), 조산(趙山), 안몽량(安夢良), 이광윤(李光胤), 안광업(安光業), 김언수(金彦秀), 안덕남(安德男) 등이 있다. 칠원 지역에는 황여지(黃汝址), 윤영상(尹榮祥), 김군걸(金君傑) 등이 있다.

1592년 4월 13일 조선을 침략한 왜적은 5월 3일 한양[서울]을 점령한 후 8도를 분할 점령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들어갔다. 9월 말에 접어들면서 진주성이 적군의 대대적인 공격 목표가 되었다. 1592년 9월 24일 하세가와 히데카즈[長谷川秀一]가 지휘하는 적군은 김해·부산·동래 등지에서 합세한 왜적 2만~3만여 명을 거느리고 김해를 떠나 창원으로 진군하였다. 9월 25일 2대로 나뉘어 노현(露峴)과 안민현(安民峴)을 넘어 들어와 경상 우병사 유숭인(柳崇仁)의 군사를 물리치고 9월 27일 창원을 점령하였다. 또 9월 26일부터 함안에 진출하여 이곳에 주둔하며 사방을 노략질함으로써, 함안 지역은 전쟁터가 되어 촌락이 파괴되고 인명이 살상당하는 피해를 입게 되었다. 이에 함안 지역의 사족들은 왜적의 침입에 맞서 곽재우(郭再祐)[1552~1617] 의병군에 참여하는 등 지역 방어 차원에서라도 항전에 결연히 나섰다. 전쟁 과정에서 전공을 세우기도 하고, 순절하게 됨으로써 충신의 위상을 얻게 되었다.

[이괄의 난 진압에 참여한 인물]

1624년 1월 인조반정에 참여했던 이괄(李适)이 반정에 대한 논공행상(論功行賞) 과정에서 소외된 데 대한 불만과 역모를 꾀했다는 무고로 체포될 위기에 봉착하자 난을 일으켰다. 이에 맞서 정부는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1566~1629]이 이끄는 토벌군을 파견하여 2월 14일 이괄을 살해하고 난을 진압하였다. 이괄의 난이 진압되는 과정에서 함안 출신으로 이휴복(李休復)[1568∼1624]과 조익도(趙益道)가 출정하여 진압의 공을 세웠다. 이휴복은 인천 이씨로 박제인(朴齊寅)[1536∼1618], 이칭(李偁)[1535~1600]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곽재우 의병에 참여한 바 있다. 그는 무과에 합격한 후 무반으로 나가 복무하고 있었다. 조익도는 조숙(趙鷫)의 아들로 무과에 합격한 후 무반으로 있으면서 이괄의 난 진압에 참여하였다.

[병자·정묘호란 때 공을 세운 인물]

한편 청나라의 침입으로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항전한 인물들도 다수 보인다. 함안에서는 이명신, 이관운(李貫雲), 조영기(趙英沂), 조징당(趙徵唐), 조계선(趙繼先) 등 5명이 참전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명신은 이칭의 아들로, 무과에 합격한 후 현감으로 있으면서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이관운은 이명신의 아들로 무과에 합격한 후 부장(部將)이 되어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국왕을 호종하였다. 조영기는 조민도(趙敏道)의 아들로 병자호란 때 의병장으로 창의하였다. 조징당은 조종도의 아들로, 무과에 합격한 후 현감을 지내면서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국왕을 호종하여 원종공신으로 책봉되었다. 조계선은 조준남(趙俊男)의 아들로, 문과에 합격했으나 출사하지 않다가 인조조에 선전관에 임명되어 정묘호란 때 이완(李莞)의 막료로 참전했다가 순절하였다.

[이인좌의 난 진압에 참여한 인물]

함안 지역 충신 가운데에는 영조 대에 발생한 이인좌의 난이라 부르는 무신란(戊申亂) 진압에 참여했던 인물도 확인된다. 함안군에서는 조익성(趙益城)이, 칠원현에서는 국담(菊潭)주재성(周宰成)[1681∼1743], 주도복(周道復)[1709~1784] 부자(父子)가 이들이다. 조익성은 조종도의 후손으로, 무신란 진압에 참전하면서 죽음을 각오한 시(詩)를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주재성과 주도복은 부자간으로 함께 무신란 진압에 참여하였다. 주재성은 창의하여 난을 성토하는 한편 참전군에 군량을 공급하였다. 일찍 사망함으로써 등용될 기회를 갖지 못했으나 좌승지로 추증되고 정려를 받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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