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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200523
한자 景山集
영어공식명칭 Gyeongsanjip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문헌/전적
지역 경상남도 함안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전병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간행 시기/일시 1978년 5월 30일연표보기 - 『경산집』 간행
성격 문집
저자 조원규
편자 조용정|조용락
간행자 조용정
권책 3권 1책
행자 15행 37자
규격 19.2×26.2㎝|14.7×21.8㎝[반곽]
권수제 경산집(景山集)

[정의]

근대 함안 출신의 학자 조원규의 문집.

[저자]

조원규(趙元奎)[1905~1967]의 초명은 원규(元奎)였는데, 나중에 한자를 바꾸어 원규(元珪)로 하였다. 자는 순부(順夫)이며, 호는 경산(景山)이다. 본관은 함안(咸安)이며, 생육신 어계(漁溪)조려(趙旅)의 후손이다. 10대조 송재(松齋)조면도(趙勉道)는 한강(寒岡)정구(鄭逑)의 문인이다. 조부는 난파(蘭坡)조면식(趙冕植)이다. 아버지는 긍와(兢窩)조성모(趙性謨)이며, 어머니는 주시용(周時庸)의 딸인 상산 주씨(商山周氏)이다. 부인은 안종호(安鍾昊)의 딸인 광주 안씨(廣州安氏)이다. 슬하에 5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조용락(趙鏞洛), 조용우(趙鏞宇), 조용기(趙鏞驥), 조용수(趙鏞秀), 조용량(趙鏞亮)이다. 이 가운데 조용우는 중부(仲父)에게 입양되어 후사를 이었다. 딸은 성산(星山)이희택(李熙宅)에게 시집갔다.

조원규는 1905년 3월 18일에 함안 가야읍 검암리에서 출생하였다. 약관의 나이에 첫째 형인 척암(惕菴)조한규(趙澣奎)와 함께 간재(艮齋)전우(田愚)의 문하에 나아가 배웠다. 집안에 종규(宗規)를 만들어 가족과 친족 간에 함께 나누고자 힘썼으며, 선조인 어계조려의 정신을 이어받아 충효과 청렴을 지키고자 노력하였다. 조원규는 노론 계열의 간재전우에게 수학하였지만, 당파에 치우치지 않았다. 중국남송의 주희(朱熹)가 지은 책을 깊이 연구했으며, 『좌전(左傳)』과 『당송 팔가문(唐宋八家文)』을 즐겨 읽었다. 1967년 9월 1일에 죽었으니, 향년 63세였다. 묘소는 함안 자양산 아래 가사촌 뒤편에 있다.

[편찬/간행 경위]

『경산집(景山集)』은 조원규가 죽은 후, 조카 조용정(趙鏞政)과 아들 조용락 등이 남겨진 시문을 수습하여 편찬하였으며, 1978년 5월 30일에 발행하였다. 서문(序文)은 1970년 9월에 조원규와 동문인 정도현(鄭道鉉)이 지었으며, 발문(跋文)도 동문인 정관석(鄭瓘錫)이 1971년 1월에 작성하였다.

[형태/서지]

3권 1책의 신연활자본(新鉛活字本)이다. 판식은 사주 쌍변(四周雙邊)으로, 계선(界線)이 있다. 크기는 가로 19.2㎝, 세로 26.2㎝이며, 반곽의 크기는 가로 14.7㎝, 세로 21.8㎝이다. 1면 15행에 1행의 자수는 37자이다. 권수제는 '경산집(景山集)'으로 되어 있다.

[구성/내용]

권1에는 시(詩) 31편, 편지 14통, 서문 6편, 기문(記文) 7편, 논(論) 1편, 발문 2편이 실려 있다. 편지는 창수(蒼樹)정형규(鄭衡圭), 주사영(周士英), 겸재(謙齋)정관석, 월헌(月軒)이보림(李普林), 여암(厲菴)정도현, 비천(飛泉)전기진(田璣鎭), 족숙 조성지(趙性智), 주정식(周貞植), 이도형(李道衡), 안영옥(安永玉), 전용익(田溶翼) 등에게 보낸 것이다. 논에 실려 있는 작품인 「존명론(尊明論)」은 임금과 나라가 망한 상황에서 중국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킨다는 명분이 얼마나 허황한 일인가를 논설했다. 그러므로 지금은 조국을 존중하고 4,000년 문화와 교육을 사모하여 다시 새롭게 일어서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권2는 제문(祭文) 19편, 고유문(告由文) 4편, 행장(行狀) 1편, 행록(行錄) 2편, 사적 1편, 비문(碑文) 5편, 묘갈명(墓碣銘) 8편, 묘표(墓表) 2편, 전(傳) 2편이 수록되어 있다. 권3은 부록으로, 조원규를 추모하는 만시(挽詩) 및 제문과 행적을 서술한 가장(家狀), 행장, 묘갈명이 첨부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조원규는 일제 강점기에 출생하여 6·25 전쟁을 겪었으며, 근대에까지 생존한 학자이다. 조원규의 삶과 문집을 통해 역사적 격변 속에서 전통 시대 가치관을 어떻게 지키고자 노력했으며, 그것은 이전의 학문 및 사상과 무엇이 다른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1900년대 중후반 함안 지역의 사회상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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