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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200361
한자 土器
영어공식명칭 Pottery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함안군
시대 고대/삼국 시대/가야
집필자 김석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경상남도 함안군

[정의]

경상남도 함안 지역에서 출토된, 점토로 빚은 후 불에 구워 만든 그릇.

[개설]

우리나라에서 처음 토기가 발생한 때는 이집트와 서아시아, 인도, 중국과 비슷한 기원전 6000~5000년경으로 추정되는데, 당시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토기는 서아시아와 중국의 채문 도기(彩文陶器) 문화와는 계통을 달리하는 빗살무늬 토기 문화로 한반도 전역에 넓게 분포하면서 발전을 거듭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선사 시대에서 통일 신라 시대에 걸쳐 만들어진 것을 토기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삼국 시대 이후의 토기를 도기로 명명하기도 한다. 신석기 시대부터 사용을 시작한 토기가 어떻게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는가에 대하여 여러 견해가 있지만, 토기가 인류 생활에 큰 변화와 발전을 주었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토기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은 불을 발견한 것에 준하는 혁명적인 일이었을 것이며, 인류가 농경을 시작하였지만 토기가 없었다면 잉여 농산물을 비축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토기는 제작 과정상에서 굽는 온도에 따라 크게 와질(瓦質)과 경질(硬質)로 분류된다. 와질 토기는 한뎃가마[노천]에서 구워지는데, 그 온도가 약 600~700℃ 사이로 표면이 기와와 비슷한 느낌을 주며, 매우 약해서 조금만 힘을 줘도 깨지기 쉽기 때문에 붙은 명칭이다. 청동기 시대 점토 띠 토기[점토대 토기(粘土帶土器), 아가리에 점토 띠를 붙여 만든 토기로 덧띠 토기라고도 한다]의 뒤를 이어 함안 지역을 비롯한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 1~3세기에 사용되었다. 이에 비해 경질 토기는 가마를 이용해 약 1,000℃ 이상의 온도에서 구워 단단한 질감을 가지고 있어 붙은 명칭이다. 이와는 별개로 거의 도자기를 굽는 온도에 육박하는 약 1,100~1,300℃ 사이에서 제작되어 질감이나 강도가 매우 강한 도질 토기(陶質土器)로 분류되는 것도 있다.

[변천]

함안 지역을 대표하는 불꽃무늬 굽구멍[화염문 투창]이 새겨진 '공(工)' 자 모양의 굽다리 접시[고배(高杯), 굽다리 부분이 통 모양의 형태를 가진 토기로 통형 고배(筒形高杯)로도 지칭된다]는 4세기 대부터 함안에서 나타나기 시작하며, 이외에도 짧은 목 항아리[단경호(短頸壺)], 화로 모양 그릇 받침[노형 기대(爐形器臺)]이 등장하는 등 와질 토기 단계인 1~3세기에 비해 그릇의 종류도 다양해지게 되었다. 4세기 대부터 아라가야의 세력 팽창에 따라 함안 지역의 토기들은 인접한 낙동강남강을 따라 경상북도나 전라남도 등 다른 지역에까지 파급되었는데, 당시 함안 지역의 대표적인 토기 생산지가 함안군 법수면 우거리 일대임이 국립 김해 박물관의 발굴 조사로 밝혀지기도 하였다.

5세기 전반의 토기 양식은 4세기 대 토기 양식의 전통이 부분적으로 유지되면서 제작 기술의 발전을 이루었는데, 그 형태와 종류가 더욱 다양해지고 독창적이며 함안 지역만의 지역성이 가미된 이른바 '함안식 토기'라 불리우는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당시 함안 지역 지배층의 지배력이 한층 증가하면서 지배 계층의 무덤에 부장되는 토기의 형태와 종류가 다양해지고 그 양도 증가하였다.

5세기 중반·후반의 토기들은 5세기 전반보다 더 다양하게 전개되면서 구체화되고 정형화된 함안식 토기가 주류를 형성하였는데, 아라가야의 최전성기를 보여 주는 당시 수장급 분묘에서 이러한 토기를 비롯한 최상의 유물이 다량 발굴되었다. 이때 함안 지역을 대표하는 토기는 굽다리 접시의 굽다리['工' 모양 중 중앙 연결 부분]에 불꽃무늬의 굽구멍 문양이 새겨진 불꽃무늬 굽구멍 굽다리 접시[화염형 투창 고배(火焰形透窓高杯)]이며, 이 밖에도 삼각 굽구멍 굽다리 접시[삼각 투창 고배], 긴 목 항아리[장경호] 등 5세기 전반기보다 더욱 다양한 형태와 굽구멍을 지닌 양식들로 발전하게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특이하고 다양한 형태를 가지는 이형 토기(異形土器)들이 다른 지역보다 많이 제작되어 지배 계층의 부장품으로 널리 이용되었다.

6세기 대의 함안 지역 토기들은 5세기 중반·후반 함안식 토기에 비해 양과 질적인 면에서 그 격이 현저하게 떨어지며, 기종은 주로 굽다리 접시와 그 뚜껑으로 전체적인 형태가 전 단계에 비해 조잡하고 크기도 작아지며 다소 이질적(異質的)인 양상으로 변하였다. 6세기 당시 가야 지역에 대한 신라와 백제의 첨예한 대립 속에서 함안의 아라가야를 비롯한 남아 있는 가야 세력들은 독자성 유지 및 존립 자체가 어려웠으므로 그 여파가 반영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함안 지역의 독자성보다는 신라, 백제 또는 주변 가야 지역의 문화 양상이 함안 지역으로 유입되어 결국 함안의 독자적인 토기 문화는 상실되고 말았던 것으로 해석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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