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맹의섭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1480
한자 孟義燮
분야 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윤철원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1년 3월 10일연표보기 - 맹의섭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09년 3월 - 맹의섭 연기배달학교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13년~1914년 - 맹의섭 조치원 야학 강습소 개설 및 운영
활동 시기/일시 1918년 3월~1920년 2월 - 맹의섭 연기청년회 제1대, 제2대 회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2월~1919년 4월 - 맹의섭 조치원 3.1만세운동 주도
활동 시기/일시 1922년~1923년 - 맹의섭 불령선인으로 지목되어 투옥
활동 시기/일시 1924년~1945년 - 맹의섭 연기청년학원 개설 및 운영
활동 시기/일시 1925년~1945년 - 맹의섭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외일보 기자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27년 11월 - 맹의섭 필화사건 발생
활동 시기/일시 1925년~1936년 - 맹의섭 호서기자동맹 상무집행위원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32년~1934년 - 맹의섭 『연기지』 발간에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47년~1952년 - 맹의섭 조치원읍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47년~1961년 - 맹의섭 근화원 설립 및 운영
활동 시기/일시 1965년~1967년 - 맹의섭 대한노인회 연기군 지회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72년 - 맹의섭 『추운실기』 발간
몰년 시기/일시 1975년 9월 4일연표보기 - 맹의섭 사망
출생지 맹의섭 출생지 - 충청남도 천안시
거주|이주지 맹의섭 거주지 -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지도보기
학교|수학지 맹의섭 수학지 -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지도보기
활동지 맹의섭 활동지 -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지도보기
묘소 맹의섭 묘소 -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고복리 산54-1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언론인|행정가
성별
본관 신창
대표 경력 연기청년회 제1대, 제2대 회장|호서기자동맹 상무집행위원|조치원읍장|근화원장

[정의]

세종 지역에서 활동한 항일인사이자 초대 조치원읍장을 지낸 행정가.

[개설]

맹의섭은 일제강점기 조치원 3·1 만세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조선일보·동아일보·중외일보 기자를 지내면서 호서기자동맹을 조직하여 일제에 항거한 언론인으로써 옥고를 치르는 등 탄압을 받았다. 광복 후 초대 조치원읍장을 역임하면서 고아를 위한 근화원을 설립·운영하는 등 일생을 항일과 지역 발전을 위해 헌신한 인물이다.

[가계]

[활동 사항]

맹의섭은 일제강점기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에서 활동한 애국지사이다. 맹의섭은 1918년 3월 1일 연기청년회를 조직하고 제1대, 제2대 회장을 역임하였다. 연기청년회는 일제 강점기에 전국 최초로 조직된 한국인 청년단체로서 지역청년의 친목도모와 품성도야를 위해 결성하였는데 1919년 3월 23일 조치원을 중심으로 한 인근지역 횃불만세와 3월 30일 조치원 장터만세운동에서 주도적인 활동을 하였다. 맹의섭은 연기청년회 조직을 적극 활용하여 조치원에서 3.1독립만세 운동을 일으키는 데 성공하였으나 이 때문에 일제로부터 감시를 받으면서 옥고를 치르는 등 고초를 겪었다.

또한 맹의섭은 조선일보·동아일보·중외일보 기자를 지내면서 언론을 통하여 일제에 항거하였다. 1925년 충남북지역 일간지와 잡지사에 종사하는 언론인을 규합하여 ‘호서기자동맹’을 조직하고 상무집행위원 등 주요 직책을 지내면서 1936년 일제로부터 강제 해산 당할 때까지 충청지역 언론의 권위신장을 위해 노력하였다. 1927년 가을에는 조치원공립보통학교 운동회에서 회보에 ‘개인은 평등이나 사회는 불평등’이라는 기사를 게재하여 일제로부터 탄압을 받는 필화사건을 겪었다.

1924년부터 1945년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연기청년학원’을 운영하여 조치원 지역에서 정규교육을 받지 못하는 가난한 청소년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1932년 연기향교 장의(掌議)에 선출되어 『연기지』[1934]를 주도적으로 발간하였다. 『연기지』는 일제의 식민사관에 대응하는 향토사적 저항으로써 책 내용 중에 임진왜란 당시 연기 지역에서 왜군과 맞서 싸운 영규대사의 동진평(東津坪) 전투, 청주성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연기 출신 박천붕의 행적 등을 수록하였는데 이는 당시 지역주민에게 항일의식을 심어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광복 후 미군정기인 1947년 7월 초대 조치원읍장에 임용되어 1952년까지 5년간 재직하면서 혼란기 주민생활 안정을 위해 노력하였다.

1947년 가정형편이 궁핍하여 집을 나온 아동과 고아를 위하여 근화원(槿花園)을 창립하고 1962년까지 16년간 운영하였다.

1972년 자신의 일대기를 담은 회고록 『추운실기』를 발간하였으며 1975년 9월 4일 별세하였다.

[저술 및 작품]

1972년 자서전 성격의 회고록인 『추운실기』를 발간하였다.

[묘소]

묘소는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고복리 산 54-1에 있다.

[상훈과 추모]

2020년 6월 22일 독립유공자 신청을 하였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