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3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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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文義縣 |
영어공식명칭 | Munuihyeon |
이칭/별칭 | 일모산군,연산군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근대/개항기 |
집필자 | 안경희 |
[정의]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 일대의 옛 행정 구역.
[개설]
문의현(文義縣)은 충청북도 청원군 부강면 일대가 소속되어 있던 조선시대 행정구역으로, 백제 때 일모산군(一牟山郡)이었으나 757년(신라 경덕왕 16) 연산군(燕山郡)으로 고쳐지고 고려시대인 1260년(고종 46)에 문의현으로 고쳐졌다.
그 뒤 여러 차례 변천을 거쳐 1895년(고종 32) 군으로 승격되었으며, 1914년 면으로 개편되어 청원군에 속하였다가 2014년 7월 1일 충청북도 청원군과 청주시가 통합 출범하면서 청주시에 편입되었다.
특히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은 문의현, 청주목, 연기현의 경계에 있으며, 주로 문의현 삼도면에 속하여 있던 지역이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의 지방행정제도는 조선초 고려의 제도를 답습하다가 왕권이 확립되면서 개편·정비되었다. 고려 후기에 정비되기 시작한 행정구역을 모체로 수정을 거쳐 1413년(태종 13)에 제도화되었다.
조선의 8도제는 8도에 각각 관찰사를 두고 8도 아래의 부, 목, 군, 현 등 대소에 각 읍을 두는 제도였다. 문의현은 8도 중 충청도의 좌도 충주목의 문의현에 소속되었다.
[관련 기록]
『고려사(高麗史)』나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여지도서(輿地圖書)』,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 『여도비지(輿圖備志)』, 『대동지지(大東地志)』 등 옛 지리지나 읍지 등에 문의현 관련 기록들이 있다.
각 지리지와 읍지들은 형식과 방식에 차이가 있으나 연혁을 시작으로 호구, 군정, 성씨, 전답, 토의, 토공, 약재, 토산, 성곽, 역원, 불우, 인물, 관원, 형승, 산천, 학교, 사묘, 고적, 열녀, 제영 등 여러가지 자세한 상황들을 기록하고 있다.
[내용]
문의현(文義縣)은 조선시대에 충청도 청주진관에 속하여 있던 현이었다.
15세기에는 가호가 353호, 인구가 1,871명이었다. 군정 중에는 다른 지역에 드문 감영 소속 군정이 50명이나 되고 진군(鎭軍) 124명, 선군(船軍) 26명, 시위군(侍衛軍) 18명이었다. 토지는 2,754결이었다. 이 가운데 논은 3/9 정도였다.
문의현 수령은 종5품 현령이었고, 조선 후기에는 음서 출신자를 수령으로 임명하였다. 1914년 지방행정구역 통폐합 때 청주에 합쳐져 문의면이 되었다.
[변천]
본래 백제의 일모산군(一牟山郡)이었다가 신라 때 연산군(燕山郡)으로 고쳤고, 고려에서 옛 이름을 인습(因襲)하여 청주(淸州) 임내로 삼았다. 1172년(명종 2) 임진에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고, 고종 말년 무오년에 위사 공신(衛社功臣) 박희실(朴希實)의 내향(內鄕)이라 하여 문의현령(文義縣令)으로 승격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문의현은 침탈을 많이 받아 청주에 합쳐졌다가 다시 현으로 복구되었고, 조선 후기에는 대부분 방위를 딴 7개 면으로 구성되었다.18세기 편찬된 『문의읍지』에 의하면 18세기에는 호구가 2,778호였고 남자는 4,450명, 여자는 4,206명이었다. 『여지도서』에 의하면 토지는 밭이 2,048결, 논이 947결이었다. 1900년(고종 37)의 『문의군양안(文義郡量案)』에는 7개 면에 가호가 4,459호, 토지가 2,230결이었다.
1895년(고종 32)의 23부제 개혁 때 공주부 소속의 문의군으로 승격되었다가 1914년 청주에 합쳐져 문의면이 되었다.
[의의와 평가]
문의현 지명의 변천과 행정구역의 변동을 통해 세종특별자치시 역사의 일부를 고증하고 추측할 수 있어 귀중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