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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만 할아버지의 사회활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T03008
한자 -社會活動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건입동
집필자 김미진

건입동마을회

1989년 3월 1일 여러 가지 전통문화 등을 살려야 한다는 취지에서 건입동 향토문화보존회를 만들었다. 처음 회장은 그 모임 중에서 제일 나이 많은 사람이 하는 어른이 하는 것이 순리이므로 김태선씨가 1대, 2대 보존회장 하다가 두 번째로 고봉만이 맡아서 3대(1993.2~1995.1), 4대(1995.2~1997.2) 회장을 지냈다. 1997년 5월 2일 건입동 향토문화보존회는 건입동마을회로 이름을 바꾸어 발족했다. 건입동마을회의 회장은 초대 전군현이 지내다가 현재 김병언이 회장이다.

고봉만이 향토문화보존회 회장을 할 때인 1996년 2월 세림원색인쇄사에서 『건입동지』를 발간하였다. 건입동 향토문화의 보존을 위해 책을 만들려고 이전까지의 건입동 관련 문서들을 찾아보았는데 모두 관리 부실로 훼손되거나 소각되어버려서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향토문화의 소중함이 크게 부각되지 않던 시대라 그 중요성을 알지 못했던 듯하다. 그래도 미약하나마 일단 첫 번째 책이라도 하나 만들어놓자는 생각으로 건입동지 발간사업을 준비하게 되었다고 한다. 시청에 보조요청을 하여 4백 만원인가 받아 1996년도 『건입동지』 만들게 되었다. 그리고 2007년 다시 『건입동지』발간을 준비하고 있다.

건입동 노인회

그의 집 뒤편에 있는 노인회관에서는 매일 모여서 노래 부르고, 건강체조도 하고 또 며칠에 한 번씩 밥도 먹이고 고기도 삶아 먹고 한다. 그러나 고봉만은 노인회관 낙성식 할 때만 갔지 그 후론 안 가봤다고 했다. 아직 노인이 안 된 모양이라고 오라는 소리를 않는다고 했다. 노인회관을 지을 때 건입동 향토문화보존회 회장을 할 때였는데 건입동 어린이집과 한 마당을 쓰는 노인회관을 짓게 되자 아이들이 시끄럽고 해서 어린이집을 다른 곳으로 옮기자는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반대였다. 어린이가 없는, 새싹이 안 나는 나라는 죽은 나라나 같다. 사람도 마찬가지여서 노인과 어린이는 같이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지금도 ‘실버 타운’이라고 해서 노인들은 노인끼리만 따로 살게 하는데 잘못된 것이라고 했다. 아이들은 노인을 공경하는 법을 배우고 노인들은 아이들 노는 것에서 기쁨을 얻고 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그의 논리이다. 결국 어린이집은 그 자리를 지켰고 노인회관과 같이 오랜 세월을 보냈다. 2006년 하반기에 노인회관을 출입국 관리사무소 쪽에 하나 더 신축했는데 그는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고 했다.

친구 관계

학교를 다니지 않아서 공부도 못했지만 동창이라는 것도 없다. 그리고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또래라기보다는 손윗사람이 많다. 직장도 없고 일가친척도 돈이 있을 때는 많이 붙지만 남을 도와줄 형편이 못되면 소용이 없어서 형님들도 일본에 가있고 특별히 가깝게 지내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가장 친한 친구로는 어렸을 때 친구로 화북 출신의 한 살 밑의 안경화라는 친구를 들었다. 네 명이 친하게 지냈었는데 둘은 죽고 안경화 마저 서울에 산다고 했다. 그 친구와의 추억으로는 바닷가에 미역 비슷한 듬북을 걷어서 밭의 거름으로 썼었는데 하나씩 주워서는 도저히 끝이 안날 것 같아서 친구들과 같이 커다란 갈고리 같은 것을 만들어 끈을 달았다고 한다. 갈고리를 놓고 멀리서 친구들과 끈을 잡아당기니 바닷가에 널린 듬북이 긁어져 한데 모아져서 한꺼번에 거름용 듬북을 모을 수 있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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