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T030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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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職業-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건입동 |
집필자 | 김미진 |
가마니 장사
4·3 사건으로 중산간 마을의 토벌이 시작되었을 때 고봉만의 형들은 그전에 일본으로 돈 벌러 갔고 하나 남은 아들인 고봉만이 위험해질까봐 아버지는 해안가 마을로 내려가라고 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소 판돈을 쥐어주자 그걸 가지고 혼자 열다섯에 내려와서 건입동 서부두 쪽에서 장사를 시작했다. 어린 때는 이것저것 심부름을 하다가 가마니 장사를 시작했다.
제주의 가마니를 ‘멕’이라고 하는데 수확해 들인 곡식 등을 보관할 때 사용했다. 지역에 따라서는 '망텡이', '맥고리', '창멕', '멱서리', '멱둥구미', '망테기'라고도 했는데 지역차라기 보다는 크기에 따른 차로 구분된다. 제주에서는 ‘산듸’라고 하는 밭벼의 짚으로 가마니를 짜는데 잘 두드린 다음 하나씩 엮어서 만든다. 제일 큰 것은 ‘창멕’으로 항아리나 뒤주역할을 한다. 그 외에도 파종을 위해 씨를 담아두는 씨 망텡이도 ‘멕’의 일종이다.
손으로 짜려면 시간이 많이 걸려서 육지에서 가마니를 기계로 짜서 제주에 배로 들여왔다. 도매상에 가서 가마니를 싸게 사서 짊어지고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팔러 다녔었다.
휘발유 밀매
1950년대에 모슬포 제일훈련소가 생겼는데 후생사업 나오는 군인들 담배 값을 하려고 군용차에서 휘발유를 빼서 파는 경우가 많았다. 가만히 보니 그걸 사두었다가 팔면 이익이 남겠다 생각하여 휘발유 밀매를 하기도 하였다. 당시 50원을 주어서 휘발유를 사면 나중에 150원까지 받을 수 있었다. 보통은 군인들에게 산 가격에 10원 20원 정도 붙여서 판다. 무허가로 숨어서 하는 장사였기 때문에 숨겨두었다고 팔곤 했다.
나무 심는 데 감독
군에서 제대를 하고 처음 했던 일은 지금의 정실 방선문이 있는 곳에 나무 심는 것을 감독을 하는 일이었다. 지금도 개를 키우고 마당에서는 얼마 전에 태어난 강아지들이 뛰어놀고 있는데 제대 하고부터 개를 키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직장이 없으니까 옆집에 살던 사람이 나무 심는데 감독을 해달라고 해서 선뜻 하겠다고 했다고 한다. ‘들렁귀’라고 하는 지금의 제주교도소가 있는 근처에 방선문이라고 하는 곳에 나무 심는 일을 하게 되었다. 새벽에 밥을 먹고 점심을 싸서 집을 나서면 지금 도남동 쯤 까지 걸어가면 동이 텄다. 그렇게 걸어서 들렁귀에 가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내려오면 캄캄한 밤이 되곤 했다. 집에서는 한 번도 해를 본 일이 없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퇴비 사업
결혼을 하고 살려니 제주도에서는 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고봉만에게는 아무런 밑천이 없었다. 어느 날 산책을 하다가 일도동 쪽에 분뇨탱크가 방치된 것을 보고 퇴비를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였다. 오랫동안 쓰지 않고 방치한 터라 막대기를 가지고 누르니 위에는 딱딱하게 굳어있고 아래는 아직 물기가 있어서 넘쳤다. 이것으로 퇴비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같이 일할 사람을 두 명 데리고 일하기로 했다. 일을 하다가 술과 안주를 가지러 집에 다녀왔더니 일하던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 사람들의 집에 찾아 갔더니 혓바닥에 모래가 박혀 죽어도 그런 일은 못하겠다고 했다고 한다. 일을 도와주는 사람을 구하지 못하여 결국 부인과 둘이 분뇨를 퇴비로 만드는 일을 해야 했다. 어떻게 하면 거름을 만들 수 있는지 궁리했다. 분뇨탱크에 합판을 배처럼 띄워 그 위에 앉아서 퍼 올려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밧줄을 걸어 도르레로 부인이 당겼다 놓았다하면 왔다갔다 해가면서 분뇨를 퍼냈다고 한다. 고봉만은 팬티만 입고 자동차에 쓰는 오일을 몸에 바르고 일을 시작했다. 그런 성실한 모습을 보고 동네사람 중에는 거름을 만드는데 쓰이는 보릿짚을 그냥 주는 분도 계셨다고 한다. 보릿짚 한 짐에 거름 한 짐을 해서 거름눌(노적가리)을 2개를 큼직하게 만들어 놓으니까 농사원에서는 퇴비증산을 하라고 지원금으로 삼 만원과 삽, 곡괭이, 호수 등 농기구를 부상으로 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퇴비증산 왕이 되었던 것이다.
그의 아내에게 “우리 아덜이영 결혼 해시문 경 거름 내래는 안 댕기주(우리 아들과 결혼 했으면 이렇게 거름 내러는 안다니지)” 하며 비웃던 동네사람들도 어떤 사람은 “아이고 우리 딸 신디 결혼해시문...(우리딸과 결혼 했으면)”하기도 하고 “아이고 부지런한 사람 떡 궝 멕이주(부지런한 사람에게는 떡을 구워서 먹인다)”하고 칭찬을 하기도 했다.
보리농사
농사원에서 상을 받고 나니까 동네 사람들의 인식도 달라져 자원해서 밭들을 빌려주었다고 한다. 그냥 남들처럼 짓는 농사법을 택하면 수확도 그만큼밖에 나오지 않을 것이므로 농법을 개량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밭을 갈 때 보통 소를 이용하여 쟁기로 갈기 때문에 깊이 갈지 못하여 땅의 성질이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제주도 축산시험장에 미국에서 들여온 트랙터를 빌려서 밭을 갈게 되었다. 사람이나 소가 하는 것보다 기계로 하니 땅을 깊이 팔 수 있고 시간도 단축되었다. 땅도 깊이 파고 퇴비도 많이 뿌렸다. 이 소식을 듣고 농사원에서는 골보리를 시도해보려고 고봉만에게 골보리 농법을 권유하였다. 고봉만은 농사원의 말을 듣지 않고 고집대로 산파법을 택했다고 한다. 산파는 흩어 뿌리는 농법인데 수확을 하고 보니까 호미로 못 벨만큼 보릿대가 굵었다고 한다. 수확하는 날은 천기당(기상청)에 전화를 걸어 맑은 날을 잡고 일을 시작했다. 약 2천 평 가까이 되는 땅에 30여명의 인부를 빌어서 보리를 베기 시작했다. 그런데 보리 수확을 시작한 날 오후 고봉만의 아버지께서 장마가 진다면서 보리를 빨리 묶으라고 하셨다.
기상청의 일기 예보를 믿기는 했지만 아버지의 연륜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호미 하나는 허리에 차고 하나는 손에 들고 보리를 베어 묶어서 던져두고 다시 베고 하여 그날로 다 베었다. 동문로터리에 있는 쌀집에 가서 가마니 짜는 베를 사다가 무거워서 잘 들지도 못할 정도로 한 아름씩 묶었다. 그날 밤을 새가면서 보리 눌(낟가리)을 만들었다. 고봉만은 땀이 많은 ‘땀보’라고 자신을 설명하면서 열심히 일을 하다 보니 땀인지 비인지 모르지만 얼굴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고 한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날이 밝을 때 까지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부터 장마가 지기 시작하여 고봉만은 천기당(기상청)으로 달려가 날씨 예보를 믿고 농부들이 농사를 지을 수 있겠냐며 으름장을 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도 그 이후는 다시 농사를 짓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그 일이 정말 계기가 되어 그 이후 고봉만은 농사보다는 상업이나 목축업으로 생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보리타작을 해야 하는데 지나가던 사람이 자기네 공장에 와서 보리를 타작하라고 권했다. 그러나 고봉만은 킹마트 앞에서 서쪽으로 50m 정도가면 바늘 공장이 있었는데 그 옆에 김정재라는 친구가 보리타작을 하고 있어서 그 친구에게 맡기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곳에서 타작을 하자고 해서 난감했으나 거절했다. 그랬더니 보리 몇 말 가지고 건방지게 군다고 싸움이 난 적도 있었다.
양계장
1960년도 후반 특별히 하는 일이 없었던 시기였는데 친한 사람이 돈 2만원을 꾸어가서 한 달 후쯤 자기가 키우는 닭으로 갚았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닭 마흔 여섯 마리가 2만원은 안되겠지만 고봉만집 마당에다가 닭 망까지 모두 설치해 주고서 그걸로 빚을 청산하자고 하였던 것이다. 양계 경험도 없었던 탓에 무척이나 당황스러웠지만 정성으로 키운 덕에 암탉들이 알을 낳았고, 다른 집 알은 삼십 원을 못 받는데 고봉만네 닭은 종란이라 칠십 원을 받아 그것을 위안으로 삼을 수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시청 산록계에서 근무하던 안 주사라는 사람으로부터 닭은 구젱기(소라) 껍질, 보말 껍질을 부셔 먹여야 좋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바닷가에 해녀 불턱 옆에 소라 구워 먹었던 껍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기에 주워서 절구통에 넣고 부셔서 닭들에게 주었다. 소라 구웠던 것이라 껍질이지만 구수한 냄새가 났던지 닭들이 서로 먹겠다고 난리가 났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닭장에서 닭이 나오지 않아 들어가 보니 다 죽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고봉만은 안주사를 찾아 시청에 가서 원인을 물었다. 그도 이유를 모르겠다고 해부해보자고 해서 배를 갈라봤더니 창자에 복막염이 걸려있었던 것이다. 소라 껍질을 잘게 빻아서 주어야 하는데 대충 빻아서 생긴 일이었다. 소라 껍질 중 날카로운 부분이 창자에 끼어 물집이 생기면서 복막염에 걸려서 다 죽었다. 복막염에 걸려 죽은 닭은 병들어 죽은 닭과는 다른 것인데 오일장에 가서 팔려고 했더니 병든 닭 이라고 사지도 않고 아는 사람에게 주어도 시원찮은 얼굴이었다. 결국 그 많은 닭은 땅을 파서 묻어버렸다.
제주토마 키우기
1970년대 후반부터 서귀포시 용흥동 위쪽에 목장을 해서 말도 키우고 소도 키워 봤다고 한다. 1980년도 초 ‘팔도 열전 대항’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어 제주도 차례인데 제주KBS의 이모 아나운서가 제주도에서는 어떤 것을 하면 좋겠느냐고 해서 한라문화제행사의 일환으로 했던, 말 관련 행사를 하면 어떨까 하였다. 서귀농업고등학교 운동장에서 조랑말 경주대회 같은 것을 했었다고 한다. 서귀포농고 교정에서 그 조랑말을 가지고 짐 실어서 달리거나 또는 물허벅 지어서 달리는 것, 끌고 달리는 것 등 여러 가지 행사를 했었다. 말보다는 크기가 작은 조랑말은 육지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상했던지 높은 자리에 있는 관계자가 불러서 갔더니 강아지인가 망아진가 그게 무엇이냐고 했다고 한다. 제주 토마(조랑말)의 특성을 설명하면서 진돗개는 이웃집, 주인집, 같이 다니는 사람 등 삼 이웃만 지키지만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지 오래되었는데 제주 토마(조랑말)는 고려시대부터 국토방위를 해 왔는데 아직도 천연기념물이 안 되었다고 역설했다고 한다.
제주마는 부여 및 고구려 때부터 사육되어온 말로서 기록상으로 1073년과 1258년에 탐라에서 고려에 제주마를 진상한 사실이 있으며, 1273년에 원나라가 탐라를 침공한 뒤 약 100년간 몽골 말이 유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제주마는 과하마(果下馬) 또는 토마(土馬)라고도 하였다. 과하마란 이름은 제주마가 몸집이 작아서 과수나무 밑을 갈 수 있는 말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제주마는 어깨높이 113㎝, 몸길이 122㎝로 앞쪽이 낮고 뒤쪽이 높으며, 몸길이가 긴 독특한 체형으로 다른 말들보다 뚜렷하게 작다. 몸의 균형이 전체적으로 고르게 잡혀 있으며, 얼굴이 넓다. 털 빛깔은 밤색과 붉은빛을 띤 갈색, 젖빛을 띤 흰색 등이다. 성질이 지극히 온순하여 사람을 잘 따르며 명령에도 잘 순종한다. 제주에서 사육되고 있는 제주마의 사육 수는 한때 2만여 마리에 달하였으나 현재는 1,000여 마리로 감소하였다. 그의 공로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1986년 2월 8일 혈통 및 종 보존을 위하여 천연기념물 제347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또한 혈통보존만하는 것은 수익성이 없으므로 제주도의 토종말인 제주마를 보호·육성하고 제주특별자치도의 축산·관광산업 진흥을 통해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1990년 제주경마장으로 개장하였다. 경마장 개장하기 전에 고봉만도 말을 몇 마리 가지고 있고 해서 여러 가지 관여했던 적이 있었다고 했다.
고봉만씨 부인인 전순자 직업-재봉사, 미용사
전순자는 제주동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서부두에 위치한 6·25 상의 군인들의 자활터인 ‘정양원’안에 있는 베 짜는 공장에 다녔다고 한다. 지금 제주 스위스호텔 동쪽에 정양원이 있었는데 닭 사육, 직물 공장 등을 운영했다. 정양원은 나중에 생활 보호 대상자들이 거주했던 모자원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정양원 베 짜는 공장에서도 차례가 있어서 처음에 실을 감는 일을 하는데 ‘달래’라고 하는 것에 실을 감아야 한다. 잘 감지 않으면 실이 끊어져 버리는데 실이 끊어지면 베를 짜지 못한다. 먼저 공장에 들어가더라도 실을 잘 못 감으면 다음 단계로 올라가지 못한다. 전순자는 다른 사람 보다 실을 잘 감아서 빨리 올라갈 수 있었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도 열심히 일하면서 배운 덕에 하루에 소창을 한 필을 짰다고 하였다. 또한 월급제가 아니라 자신이 짠 옷감만큼 돈을 받는 것이라서 빨리 짜지 못하고 실이 자주 끊어지면 그만큼 돈도 적었다.
직물공장에서 돈을 모아 양재학원을 들어갔다. 양재학원을 마치고 동문시장에 옷 만드는 양복점에 가서 일을 했다. 초등학교 졸업하고 직물공장에 다니다가 양재학원을 다녀서 양복점에 들어간 나이가 15살이었다. 양복점에 들어가서 막상 일을 시작했는데 일이 너무 고되어서 매일 코피가 터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것도 할 직업이 아니구나’ 생각하고 1년 만에 양복점을 나왔다고 한다.
양복점을 나오고 미장원에서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하여 아는 사람을 통해 지금의 조일약국에 위치했던 여왕 미장원에 취직을 했다고 한다. 제주도에 미장원이라고는 달랑 3개 밖에 없었는데 그 중에 하나였다. 처음에는 미용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월급도 받지 않고 배우는 것으로 해서 일을 했다가 후에는 돈을 조금 모아서 다른 직업을 구해볼까 서울에 갔었다고 한다. 그런데 마침 거기서 양재학원에 다닐 때 선생님을 만나 선생님이 운영하는 양장점에 들어가 일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이런 일을 할 바에는 제주에 가서 일을 하는 것이 낫겠다 싶어 다시 제주에 내려와 올라가기 전에 배웠던 미용기술로 출장미용사를 하게 되었다. 그때가 18살이었다. 처음에는 남의 미장원에 가서 일을 하기도 했는데 돈이 얼마 되지 않아 아는 사람을 통해 본격적인 출장미용을 하기로 했다고 한다. 표선에서 해녀들을 모아두면 파마를 하고 종달리에서 모여두면 거기에 가서도 파마를 하였다. 그 시절만 해도 미장원이 보편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곳저곳 직접 다녀야했던 것이다. 하루에 40~50명의 파마를 하기도 했는데 요즘같이 기계로 쉽게 하는 파마가 아니라 일명 ‘불파마’라는 것을 했었다. 잠시 한눈을 팔면 머리가 타 버려서 손님들에게 욕도 많이 들었다고 한다. 파마를 하면서 머리를 자르는 사람들이 늘어나 머리를 잘라서 엿장수에게 팔기도 했다고 한다.
결혼을 하고 나서는 출장 미용은 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미용실을 차리지도 않았으나 집에 찾아오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머리를 잘라 주었다. 전순자는 그것을 ‘고망 파마’라고 했는데 파마를 해주고 번 돈으로 생활비를 하곤 했었다. 1960년대는 머리 자르는 값 대신 밀가루 푸대 열 개를 가져 오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것을 빨아서 아이들 기저귀로 쓰기도 했었다.
방직공장, 양복점 경력에서도 알 수 있듯이 손재주가 뛰어나 눈으로 한번 보면 못하는 게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가끔씩 남편의 머리를 잘라준다고 하였다. 밤에 운동하러 갔다 오다가 제주동초등학교 운동장에 차량 진입 금지봉에 걸려 넘어져 팔을 다쳐서 추석 때 즈음 남편의 머리를 손질해주지 못했다고 했다. 고봉만은 아내가 머리를 손질해 주지 않을 때는 근처의 인성 이용원을 이용한다고 했다. 그녀가 자주 애용하는 미용실은 제주시청 앞에 있는 미용실인데 지금도 선배 대접하여 값을 싸게 해준다고 한다. 언젠가 한번은 남자 미용사 였는데 “삼촌 늙으민 집에 강 머리 끈차 주쿠다(아주머니, 늙으면 집에 가서 머리 잘라 드리겠습니다.)” 하는 후배 미용사도 있었다고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