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C020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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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구수마을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임선화 |
공음면 구암리 구수마을 동학농민혁명 무장기포지에서 출발하여 구암중앙교회를 지나면 길 건너에 석교리 표지석을 볼 수 있다. ‘석교리’라고 쓰여 있는 크고 굵은 글씨와 그 아래 ‘동촌, 창촌’이라 쓰여 있는 표지석을 바라보면서 오른쪽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들어가면 큰 마을이 나온다. 마을 인가를 몇 채 지나면 커다란 당산나무를 볼 수 있는데, 운치 있는 나무를 보면서 여름에는 참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 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석교리 창촌마을은 세미를 보관하기 위한 창고와 동학군의 화약을 제조한 창고가 많이 있었다 하여 ‘창두’로 부르다가 창촌으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석교리 경로당에서 석교창의 위치를 물어 봤더니, 김원태[1956년생] 씨 집을 찾아가라고 하였다. 석교창은 이제 모습을 찾아볼 수 없고, 그곳에는 개인 창고가 지어져 있었다.
당시 석교창 옆 구수마을 일대는 바닷물과 강물이 만나는 곳으로 배를 댈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곳을 개간하여 논과 밭들로 들판을 이룬다. 이 지역을 안내해 주었던 전윤오[1938년생] 씨는 당신이 젊었을 때 석교창 주변에서 장어를 잡어 먹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석교창 주변의 모습이 지금과 같이 농지 정리가 된 것은 10년 안팎이라는 말도 더불어 해 주었다.
공음면 석교리는 동학농민군이 농민 봉기를 위해 훈련을 하던 구암리 구수마을과 인접해 있다. 무장기포 당시 이곳에는 조창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영광 법성포와 뱃길이 연결되어 있어서 법성포와 배로 왕래가 잦았다. 이 때문에 이곳에는 고창ㆍ무장 지역의 세곡미[당시는 세금을 쌀로 거두었다]를 법성창으로 운반하기 위한 중간 세곡 창고가 있었다.
무장기포 당시 4000~5000명의 동학 농민군이 구수마을에서 훈련하는 동안 석교리에 살던 안덕필ㆍ송경수 등이 쌀 60석을 지원해 주었다고 전해진다. 당시는 춘궁기[식량이 부족한 봄철]인 3월인데 아무리 부자라고 해도 춘궁기에 쌀 60석을 쌓아 두는 집이 있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웠으나, 중간 세곡창이 이곳에 있었음을 연관 지어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된다. 아울러 안덕필과 송경수가 석교창을 지키는 사람이었다는 주장도 있는데, 그렇다면 쌀 60석은 이들 개인의 것이 아니고 석교창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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