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201362
한자 6·25 戰爭 咸安 戰鬪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함안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광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50년 7월 31일연표보기 - 연합군이 함안군에 집결해 북한군과 대치
종결 시기/일시 1950년 9월 15일연표보기 - 인천 상륙 작전 성공으로 북한군 후퇴
발단 시기/일시 1950년 6월 25일 - 6·25 전쟁 발발

[정의]

1950년 6·25 전쟁 초기 낙동강 방어선을 둘러싸고 함안 인근에서 벌어진 북한군과 유엔군 사이의 전투.

[개설]

6·25 전쟁의 발발을 경상남도 지방에서 확인한 때는 전쟁이 발발하고 약 3시간 후인 오전 8시경이었다. 불리한 전황이 계속해서 알려지는 가운데 1950년 7월 6일 부산에 한·미 합동 방위 사령부가 설치되었고, 8월 18일 정부 기관이 부산으로 옮겨 오면서 소위 낙동강(洛東江) 최후 보루선이 형성되었다. 당시 함안은 부산 공격의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한 북한군과 부산을 지키기 위한 연합군 사이의 치열한 접전지가 되었다. 1950년 8월 중순 미군과 경찰은 민간인의 피해를 줄이고 작전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함안 지역 사람들을 김해와 양산 지역으로 나누어 강제로 피난을 보냈다. 하지만 함안의 젊은이들은 피난지에서 연합군으로 강제 징용되었으며, 제대로 훈련도 받지 못하고 전선에 투입되어 대부분이 돌아오지 못하였다.

[역사적 배경]

북한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남침을 강행하였다. 이때 남한은 주둔하고 있던 미군이 군사 고문단 500여 명만 남기고 철수해 버린 뒤였고, 병력과 장비가 북한에 비해 열악한 상황이었다. 북한군은 7월 19일 전라북도 이리를 점령하고, 20일에는 전주를 거쳐 광주·남원·구례·순천·광양을 지나 26일에는 여수와 하동을, 31일에는 진주를 거쳐 함안 방면으로 진격하였다.

[경과]

1950년 7월 31일과 8월 1일 양일간에 연합군이 함안군 군북면에 집결하였다. 1950년 8월 1일 22시경 남한군과 북한군이 여항면 고사리에서 전투를 시작한 이래 9월 15일까지 함안 인근 고지를 사이에 두고 격렬한 전투를 치렀다.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 내야 할 유엔군의 워커(Walker) 사령관은 산이 남북으로 뻗어 천연의 요새를 이루는 함안 지역이 지형상 방어 진지로서는 아주 적합한 곳이라 판단하였다. 특히 서북산(西北山)과 여항산(艅航山) 등 마산에서 진주에 이르는 도로의 북방에는 사용할 수 있는 방어 지역이 많았다. 이 중에서도 의령, 진주, 마산 간 도로의 교차점인 함안군 군북면 중암리 부근은 고지대이자 협곡으로, 이곳에서 낙동강남강(南江)의 합류점까지는 24㎞이었다. 이것을 확인한 워커 사령관은 이 합류점을 중심으로 연합군을 함안 지역에 배치하고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이로써 진주를 거쳐 마산으로 향하던 북한군 제6사단과 이를 저지하기 위한 미군 제25사단 및 한국군이 함안 지역에서 6·25 전쟁 중 가장 치열하였던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낮에는 연합군이 전투기와 화력을 앞세운 지상군으로 북한군의 고지를 공격하였고, 새벽이나 밤에는 어둠을 틈탄 북한군이 연합군의 고지를 공격하였다. 이런 전투 경향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심해졌다. 이것은 전쟁 발발 후에 시간이 경과할수록 화력 등 보급 물자가 뒷받침이 되는 연합군과, 보급 물자가 부족한 북한군의 사정 때문이었다. 전쟁 초기인 1950년 8월 7일에는 서북산을 공격하던 미군이 중박격포와 자동화기를 이용한 북한군의 저항으로 궁지에 빠지기도 하였지만, 9월 3일경에는 북한군의 새벽 공격을 향해 공중 지원을 비롯한 야포, 박격포, 전차 등의 지원으로 약 100여 명을 사살하고 북한군을 격퇴시켰다. 그때쯤 연합군에는 약 400여 대의 전폭기로 구성된 공군의 지원이 있었다.

이렇게 치열한 함안 전투 과정에서 중요한 접전지는 여항산과 인근의 십이당산, 서북산 등이었다. 특히 서북산의 경우 8월 한 달간 주인이 수없이 바뀌었다. 제24연대 제1대대 정보 하사관은 19회였다고 증언하였으나, 정확한 숫자를 기억하는 장병은 거의 없었다. 1950년 8월 29일, 미군이 점령하고 있던 서북산 고지에 새벽 2시 45분 북한군이 공격해 왔다. 연합군은 후퇴하였다가 공군의 지원을 받아 오후 늦게 다시 진지를 탈환하였다. 그날 밤 북한군이 다시 공격해 와 일부 고지를 점령당하였다. 북한군은 야간을 이용하고 아군은 낮에 재탈환하는 식이므로 1950년 8월 18일부터 8월 말까지 북한군의 공격을 받지 않은 날이 없었다. 어떤 날은 하루에 두세 번씩 주인이 바뀌기도 하였다.

서북산은 미군의 계속적인 포격과 폭격으로 대부분의 나무가 없어져 산 전체가 황토색으로 보였다. 때문에 미군들은 늙은 중의 머리라는 의미로 중머리산 혹은 전투산(戰鬪山)이라 불렀다. 또 승리한 미군이 이 산을 떠날 때, 너무 많은 군인이 전사하고 너무 많은 전투가 이루어져, 신이 저주한 산이라는 의미로 ‘갓 뎀 마운틴(God damn mountain)’이라고 소리치며 진절머리를 냈다고 전해진다. 현재 서북산은 전투산, 중머리산 혹은 갓데미산으로도 불리는데, 이 이름들이 이때부터 유래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서북산과 김사량]

전쟁이 터졌을 때 평양 출신 작가 김사량은 북한군 방호산 부대에 배속돼 종군 기자로 참전하였다. 가장 먼저 휴전선을 넘은 김사량과 부대는 단숨에 여수·순천을 거쳐 하동까지 진격하였다. 이들은 하동과 진주를 거쳐 두 달 만인 1950년 8월에 함안군서북산에 당도하였다.

서북산을 탈환한 후 참호에 머물렀던 김사량은 마산창포만을 내려다보며 승리를 예감한 것인지, 아름다움에 반한 것인지, 평양에 보낼 서북산 발 진중(陣中) 기사를 썼다.

‘바다가 보인다. 바로 여기가 남해. 진해만을 발아래 굽어 가며 마산을 지척에 둔 남쪽 하늘 한끝, 푸른 바닷가의 서북산 700m 고지에 지금 나는 우리 군대 동무들과 같이 진중에 있다. 바윗돌을 파내고 솔가지를 덮은 은폐호에서, 저 멀리 서남쪽 통영 반도의 산줄기가 굼실굼실 내다보이며, 정면에 활짝 트인 바다 한가운데 거제도가 보인다. 그리고 올숭달숭 물오리 떼처럼 흩어져 있는 조그만 섬들은 안개 속에 가물거린다. 흐드러지게 아름다운 바다….’

그러나 북한군은 함안 전투를 시작으로 서북산에서 진격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결과]

여항산서북산을 비롯한 함안 전역에서 소모적인 전투가 1950년 9월 하순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인천 상륙 작전의 감행으로 함안 전투는 연합군의 승리로 돌아갔으며 낙동강 방어선을 넘어 북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여항산에는 아직도 6·25 전쟁과 관련된 이야기가 마을에서 전해지고 있다. 또한 서북산에는 전쟁에 대한 전적비가 있다. 화강암 틀 위에 검은 돌로 만들어진 직사각형 비(碑)가 있는데, 당시 서북산 전투에서 전사한 티몬스 대위의 아들이 미 8군 사령관이 되어 1995년 11월에 세웠다. 뒷면에는 서북산 전투에 대한 기록이 있다. 전적비 아래 땅을 파면 6·25 전쟁 때 미군들이 먹은 커피 봉지와 스푼 등이 나온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여전히 그때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지금도 6월이면 여항산 자락의 별천 마을에서는 그때 전사한 군인들의 영혼을 달래는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의의와 평가]

6·25 전쟁에서 함안 지역은 3개월간 치열한 격전지로 역사의 소용돌이 중심에 있었다. 민간인을 포함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으며, 주택은 거의 파괴되었고, 그 외 물질적 피해도 너무 컸다. 이런 피해는 미 공군의 오폭이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전쟁이 끝난 뒤 함안에는 파괴된 건물들, 황폐된 땅만 남았다. 당시 함안에는 죽거나 다친 사람들과 피난 갔다가 돌아온 가진 것 없는 이재민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부족한 식량으로 기아에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젊은이들은 대부분 피난지에서 강제 징용되어 1·4 후퇴 때 거의 몰살당하였기 때문에 일할 인력도 부족하였다. 또한 지뢰 등 전쟁 관련 위험물이 지천에 널려 있어 이를 수거하는 과정에서 하루에도 수십 건씩 사고가 발생해 사망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이** 내용을 추가해주세요.
킨 특수부대 및 진동리 부근 전투(1950.08.02.~1950.08.13.)에는 미 25사단과 부간군 6사단이 마산시, 함안군, 진주시 일대에서 전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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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기하신 의견에 관한 자료를 보내주시면 검토후 반영하겠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2020.07.24
이** 내용을 추가해주세요.
마산 서측방 전투(1950.08.02.~1950.09.14.)에는 미 25사단·미 해병5연대와 북한군 6사단이 마산시와 함안군 일대에서 전투를 하였다.
  • 답변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기하신 의견에 관한 자료를 보내주시면 검토후 반영하겠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2020.07.24
이** 6/24 수정 요청을 하였습니다. 30일이 넘도록 답변이나 수정되지 않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 답변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기하신 민원은 수정증보를 통해 반영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2020.07.24
이** 전라북도 이리 대신 전라북도 익산으로 수정하고,
미군 제25사단, 북한군 제6, 7사단이 참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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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기하신 의견에 관한 자료를 보내주시면 검토후 반영하겠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2020.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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