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201059
한자 壇廟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함안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최정용

[정의]

조선 시대 경상남도 함안 지역에 있던 제단과 사당.

[개설]

단묘(壇廟)는 조선 시대에 제사를 지내던 각종 제단과 사당을 지칭한다. 경상남도 함안 지역의 단묘로는 관에서 설치한 사직단(社稷壇), 향교에 있는 문묘(文廟), 여단(厲壇), 성황사(城隍祠), 기우제단 등이 있다. 함안의 단묘와 관련된 기록으로는 『함주지(咸州誌)』의 단묘(壇廟)조의 기록이 있다.

[내용]

1587년(선조 20) 정구(鄭逑)가 편찬한 경상도 함안군 읍지인 『함주지』의 단묘조에는 함안 지역에서 제사를 지내는 장소로서 먼저 사직단이 소개되고 있다. 사직단이란 토지신과 오곡신을 제사 지내는 곳이다. 함안에서는 군성(郡城)의 서쪽 백보쯤에 있었으며, 단과 토담이 협소하고 누추하였다. 뿐만 아니라 조선 중기에는 사직단을 지키는 사람도 없었다. 함안의 사직단은 1587년(선조 20) 봄에 그 터를 넓혀서 지었다고 전하는데, 이희성(李喜成)·오진(吳瑨) 두 사람이 그 일을 담당하였다. 단의 높이는 3척, 사방의 둘레는 25척, 토담의 둘레는 75척, 높이는 5척 8촌이었다. 신실(神室) 1칸이 단의 서남 편에 있고, 신주(神廚) 3칸은 토담 밖 서북 편에 있었다. 재실(齋室) 3칸은 신주 북편에 있어 잠가 놓고 방토(方土)를 칠하였다. 가을철 7월 무신일에 위판(位板)을 봉안했다.

다음은 문묘이다. 함안의 문묘는 향교 안에 있었다. 문묘는 공자(孔子)와 그 제자, 그리고 한국의 역대 유학자 가운데 명현을 배향한 곳이다. 당시 문묘는 건물이 비좁고 누추하여 제향에 불편하였기 때문에 고을 사람이 모두 중수하기를 원했으나 이루지 못했다.

경상남도 함안에 있었던 사직단과 문묘 이외에도 제사 지내는 장소로는 약 21곳이 있었는데 다음과 같다.

상리 사단(上里社壇)은 상리 동북 편 동산(東山)에 있었다. 하리 사단(下里社壇)은 여단(厲壇)의 북쪽에 있었다. 병곡리 사단(竝谷里社壇)은 마을의 서쪽 미륵 바위에 있었다. 비리곡리 사단(比吏谷里社壇)은 마을의 동남쪽 금이암에 있었다. 대곡리 사단(大谷里社壇)은 마을의 남쪽 압곡에 있었다. 평광리 사단(平廣里社壇)은 마을의 쌍안(雙岸)에 있었다. 산족리 사단(山足里社壇)은 마을의 동북쪽 학봉(鶴峯)에 있었다. 죽산리 사단(竹山里社壇)은 마을의 서북쪽 사등곡 산봉우리에 있었다. 안도리 사단(安道里社壇)은 마을의 서쪽 각산봉(角山峯)에 있었다. 남산리 사단(南山里社壇)은 마을의 동남쪽 개현(介峴)에 있었다. 우곡리 사단(牛谷里社壇)은 마을의 남쪽 신당산(新堂山) 위에 있었다. 백사리 사단(白沙里社壇)은 마을의 북쪽 봉산 동록에 있어 사제봉(社祭峯)이라 하였다. 마륜리 사단(馬輪里社壇)은 마을의 북쪽 월산에 있어 사제봉(社祭峯)이라 하였다. 대산리 사단(大山里社壇)은 마을의 북쪽 덕산 위에 있었다. 대산리 사단(代山里社壇)은 마을의 중아현(中丫峴)에 있었다. 안인리 사단(安仁里社壇)은 봉명정(鳳鳴亭)의 북쪽에 있었다. 산익리 사단(山翼里社壇)은 마을의 소도북령(小都北嶺) 동남쪽 5리[1.96㎞]쯤에 있어 사제봉(社祭峯)이라 하였다.

성황단(城隍壇)은 성산(城山)에 있었다. 성(城) 안의 사람들이 고목나무 밑에 집을 짓고 목상(木像)을 안치하고 음사(淫祠)라 하였다. 1569년(선조 2)에 군수 장범(張範)이 서원을 단 북쪽에 세우고 성황단을 군의 남쪽 6리[2.36㎞] 되는 익산(益山) 위로 옮기고 음사도 같이 옮겼으나 1586년(선조 19) 겨울에 음사를 철폐했다.

여단은 질병과 악귀를 몰아내는 제단인데, 하리(下里)에 있었다. 성에서 6리 되는 곳인데, 1588년(선조 21) 봄에 단의 주위를 넓히고 담장을 쌓고 문을 달았다. 유학 윤종(尹鐘)이 그 일을 맡아 했다고 한다. 아현 연단(阿見淵壇)은 군에서 북쪽 30리[11.78㎞] 되는 곳에 있었다. 가뭄이 있을 때 기우제를 지내면 영험을 보았다고 한다. 예전에 있던 단은 제도에 맞지 않으므로 1587년(선조 20) 여름에 가뭄이 심해 기우제를 올리고자 물을 향하여 새로 단을 만들었다. 여항단(餘航壇)은 1587년 여름에 오랜 가뭄으로 농사가 많이 상했다. 그래서 산 위에 석단(石壇)을 쌓아 놓고 경건하게 비니 영험이 있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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