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영호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200875
한자 周泳鎬
영어공식명칭 Ju Yeongho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 무기리
시대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고은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8년 7월 10일연표보기 - 주영호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24일 - 주영호 칠원면 구성리 시장 만세 운동 주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4월 3일 - 주영호 칠원면 구성리 시장 만세 운동 2차 시위 주도
몰년 시기/일시 1963년 7월 25일연표보기 - 주영호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3년 - 주영호 대통령 표창 추서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3월 24일 - 주영호 칠원면 구성리 시장 만세 운동 주도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4월 3일 - 주영호 칠원면 구성리 시장 만세 운동 2차 시위 주도
출생지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 무기리
거주|이주지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 무기리
활동지 경상남도 함안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함안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주영호(周泳鎬)[1898~1963]는 1898년 7월 10일 지금의 함안군 칠원읍 무기리에서 태어났다. 서울에서 벌어진 3·1 운동 소식을 듣고 손종일(孫鍾一), 이원식, 황대수, 신영수, 주영호, 황영환(黃英煥), 박경천, 윤사문, 윤형규 등이 모의하여 3월 24일 칠원 장날에 거사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후 함안군 칠원읍 무기리에 군중을 동원하는 계획을 세우고 함안군 칠원읍 용산리에서 태극기를 만들었다. 의거 당일에 칠원 장터에 모인 1,000여 명의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눠 주고 손종일이 독립 선언서를 낭독한 뒤 대형 태극기를 앞세워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며 시가행진을 벌였다. 하지만 경찰에 의해 시위 군중은 해산되었고, 밤 9시경 주영회를 비롯한 300여 명이 칠원 경찰 주재소 앞에서 구속된 지사들의 석방을 요구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4월 3일 오후 3시 칠원면구성리 시장 만세 운동 2차 시위가 일어났을 때에도 주영호는 선두에 서서 시가행진을 하였다. 오후 5시경 800여 명의 군중이 칠원 경찰 주재소 앞에서 구속자 석방을 외치고 돌을 던지다가 여러 사람이 체포되었다. 주영호는 퇴각하며 친일 칠원 면장 김보한의 집을 습격하여 봉변을 주다가 출동한 진해 경중 포병 대대 군인들에게 엄주신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악랄한 고문과 함께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 받아 마산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일제 탄압을 피하여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피신하였다. 광복 후 귀향하여 농사일을 하다가 1963년 7월 25일 66세로 작고하였다. 아버지는 주명회(周明會)이고, 자녀는 주종식·주갑식·주봉식 등 3명의 아들과 8명의 딸이 있다. 손자로는 주영환, 주명환, 주봉환 등을 두었다.

[상훈과 추모]

주영호는 독립운동에 참여한 공이 인정되어 1993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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