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200869
한자 趙昌奎
영어공식명칭 Jo Changgyu
이칭/별칭 선필(善弼),조점수(趙占守),조점시(趙占時)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사촌5길 23-17[사촌리 898]
시대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고은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6년 1월 17일연표보기 - 조창규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9일 - 조창규 함안읍 만세 운동 주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20일 - 조창규 군북 시장 만세 운동 주도
몰년 시기/일시 1978년 8월 14일연표보기 - 조창규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68년 - 조창규 대통령 표창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0년 - 조창규 건국 훈장 애족장 추서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3월 19일 - 조창규 함안읍 만세 운동 주도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3월 20일 - 조창규 군북 시장 만세 운동 주도
출생지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사촌5길 23-17[사촌리 898]
거주|이주지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사촌5길 23-17[사촌리 898]
활동지 경상남도 함안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함안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함안 지역에서는 서울3·1 운동 이후 독립 시위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이 주도하여 3월 19일 함안읍 만세 운동과 3월 20일 군북 시장 만세 운동을 거행하였다. 군북 시장 만세 운동은 조석규(趙碩奎)·조상규(趙相奎)·조용효(趙鏞孝)·이재형(李在衡) 등이 계획하였다. 그들은 미리 태극기를 제작하고 인근 지역에 계획을 알리는 등 사전 준비를 하였다.

군북시장 만세 운동은 3월 20일 오전 9시 함안군 군북면 동촌리신창 야학교에서 시작되어 군북 장터로 퍼져 나갔다. 오후 1시경 3,000여 명의 군중이 만세 운동을 전개하자 현지 경찰과 마산 중포병 대대 병력들이 공포를 쏘며 시위대를 해산시켰고, 오후 5시경에는 군중이 5,000여 명으로 늘어나 경찰 주재소로 나아갔다. 사태의 급박함을 느낀 일본 경찰이 시위대에 공포를 발사하고 조준 사격을 하면서 현장에서 21명이 순국하고 18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많은 사람이 무참히 구타당하고 체포되었다.

[가계]

조창규(趙昌奎)[1896~1978]는 자는 선필(善弼)이고 호적에 오른 이름은 조점수(趙占守)이다. 수형자 명부에는 조점시(趙占時), 독립 유공자 명부에는 조창규로 되어 있다. 아들은 조용보(趙鏞普)가 있고, 양손(養孫)으로 조도제(趙道濟)가 있으며 독립운동가 조석규는 재종형이다.

[활동 사항]

조창규는 1896년 1월 17일 함안군 군북면 사촌리에서 태어났다. 의협심이 강하였던 조창규는 서울3·1 운동 현장을 보고 돌아온 후 3월 6일부터 동지들을 규합하였다. 3월 10일 서산 서당에서 30여 명이 은밀히 모여 독립 선언 발기인회를 개최하여 3월 20일 군북 장날 의거하기로 하였다. 조창규는 함안군 전역을 순회하면서 의거 계획을 통보하고 군중 동원을 독려하였으며, 신창 야학교 등사기로 개작 축소된 독립 선언 전단과 태극기를 인쇄하였다. 3월 19일 함안읍 만세 운동에 참여하여 경찰 주재소 등을 점령하고 기물을 파괴하다 피신하였다.

3월 20일 신창 야학교 독립 선언식에 참여하고, 오후에는 군북 냇가에서 독립 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누어 주었다. 이때 시위대가 5,000여 명에 이르렀다. 시위대는 경찰 주재소를 포위하여 독립 만세를 외쳤고, 일본 군경이 시위대를 향하여 발포하기 시작하였다. 조창규는 이 사건으로 4년 형을 선고 받아 옥고를 치렀다. 1978년 8월 14일 82세의 나이로 영면하였다. 외아들 조용보는 1950년 6·25 전쟁 때 입대하여 전사하였다.

[상훈과 추모]

조창규는 독립운동에 참여한 공이 인정되어 1968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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