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200866
한자 趙周奎
영어공식명칭 Jo Jugyu
이칭/별칭 군오(君吾),이천(夷川)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사촌리
시대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고은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3년 3월 5일연표보기 - 조주규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20일 - 조주규 군북 시장 만세 운동 주도
몰년 시기/일시 1919년 3월 20일연표보기 - 조주규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68년 - 조주규 대통령 표창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1년 - 조주규 건국 훈장 애국장 추서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3월 20일 - 조주규 군북 시장 만세 운동 주도
출생지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사촌리
거주|이주지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사촌리
묘소 조주규 묘소 -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사내리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함안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함안 지역에서는 서울3·1 운동 이후 독립 시위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이 주도하여 3월 19일 함안읍 만세 운동과 3월 20일 군북 시장 만세 운동을 거행하였다. 군북 시장 만세 운동은 조석규(趙碩奎)·조상규(趙相奎)·조용효(趙鏞孝)·이재형(李在衡) 등이 계획하였다. 그들은 미리 태극기를 제작하고 인근 지역에 계획을 알리는 등 사전 준비를 하였다. 군북 시장 만세 운동은 3월 20일 오전 9시 함안군 군북면 동촌리신창 야학교에서 시작되어 군북 장터로 퍼져 나갔다. 오후 1시경 3,000여 명의 군중이 만세 운동을 전개하자 현지 경찰과 마산 중포병 대대 병력들이 공포를 쏘며 시위대를 해산시켰고, 오후 5시경에는 군중이 5,000여 명으로 늘어나 경찰 주재소로 나아갔다. 사태의 급박함을 느낀 일본 경찰이 시위대에 공포를 발사하고 조준 사격을 하면서 현장에서 21명이 순국하고 18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많은 사람이 무참히 구타당하고 체포되었다.

[가계]

조주규(趙周奎)[1883~1919]는 자는 군오(君吾), 호는 이천(夷川)이다. 조주규의 아들은 조용수(趙鏞秀), 조용갑(趙鏞甲), 조용한(趙鏞漢)이 있고, 손자는 조증제(趙曾濟), 조상제(趙尙濟), 조춘제(趙春濟), 조점제(趙点濟), 조기제(趙基濟), 조성제(趙星濟), 조정제(趙正濟)가 있다. 증손자는 조창래(趙昌來), 조봉래(趙鳳來), 조경래(趙敬來), 조성래(趙成來), 조광래(趙光來), 조원래(趙元來), 조전래(趙田來), 조진래(趙鎭來)가 있다.

[활동 사항]

조주규는 1883년 3월 5일 함안군 군북면 사촌리에서 태어났다. 성품이 강직하여 1910년 나라를 빼앗기자 사촌 동생 조석규, 조형규 등과 함께 나라 찾는 일에 몰두하였다. 고종이 붕어하자 나라 잃은 서러움과 충의를 다짐하는 이천 탄시(夷川歎詩)를 짓기도 하였다. 고종 인산(因山)에 참여하였다가 서울의 만세 시위에 참가하고 돌아왔다. 이후 함안 지역의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3월 19일과 3월 20일 함안읍 만세 운동, 군북 시장 만세 운동을 모의하였다. 조석규, 조형규와 함께 국권 회복에 신명을 바칠 것을 다짐하고 조상규, 조용섭, 김우곤 등과 더불어 서산 서당에서 태극기와 독립 선언서를 제작하였다.

3월 20일 9시경 신창 야학교 교정에서 거행된 독립 선언식에 참여하고, 오후에는 군북 냇가로 군중을 모이게 하였다. 오후 1시경 3,000여 명의 군중이 결집하여 독립 선언식을 거행하고 앞장서서 시위행진을 지휘하였다. 오후 5시경 경찰 주재소에 이르렀을 때는 군중이 5,000여 명에 이르렀다. 일본 군경이 시위대에 공포를 쏘니 군중은 투석으로 대항하였다. 이에 일본 군경은 시위대를 향하여 주모자를 골라 흉탄을 발사하였고, 이 과정에서 조주규는 일본 군경에 난타당해 순국하였다.

[묘소]

조주규의 묘소는 함안군 가야읍 사내리에 있다. 1985년 애국 선열 묘역 정화 사업으로 묘역을 정비하고 묘비를 세웠다.

[상훈과 추모]

1968년 대통령 표창, 1991년 건국 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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