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석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200859
한자 趙鏞錫
영어공식명칭 Jo Yongseok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함안군
시대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장혜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6년 4월 26일연표보기 - 조용석 출생
몰년 시기/일시 1950년 9월 17일연표보기 - 조용석 사망
추모 시기/일시 2002년 - 조용석 대통령 표창 추서
출생지 경상남도 함안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함안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조용석(趙鏞錫)[1896~1950]은 서울경신 학교(儆新學校)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월 2차 독립 시위 운동 참가하였다. 1919년 3월 5일 아침, 남대문역 광장에서 시위 운동이 있었다. 학생단의 주도 면밀한 사전 준비 속에 남대문역 광장에 모여든 군중은 수천 명을 헤아렸다. 학생단 대표로 연희 전문 학교의 김원벽과 보성 법률 상업 학교의 강기덕이 제2차 독립시위 운동을 주도하였다. 군중은 일제히 독립 만세를 부르고, 남대문 방향으로 만세를 부르며 시가행진을 하였다. 이때 붉은 완장을 두른 학생들이 격문을 뿌렸고 시위에 동참하는 군중은 1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남대문 앞에 이르자 시위대를 제지하기 위해 출동한 일제 경찰과 관헌이 김원벽, 강기덕 등 지도부 50여 명을 체포하였다. 검문을 면한 시위대는 여러 무리로 나뉘어 한 무리는 남대문 시장에서 조선 은행 앞을 지나 종로보신각으로 향하고, 다른 한 무리는 남대문에서 대한문 앞과 무교정을 거쳐 종로보신각으로 향하였다. 대한문 앞에는 약 1만 명의 군중이 모여 만세 시위를 벌였고, 정오 무렵이 되자 여러 무리로 나뉘어졌던 시위대가 다시 보신각 앞에 집결하여 독립 만세를 부르다 강제 해산을 당하였다. 이때 많은 학생들이 중상을 입었고, 조용석을 포함한 75명은 종로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조용석은 약 5개월의 옥고 끝에 1919년 11월 6일 경성 지방 법원에서 징역 6개월에 집행 유예 3년을 선고 받았다.

[상훈과 추모]

2002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 국가 보훈처 공훈록(http://www.mpva.go.kr)
  • 독립기념관 독립운동가 공훈록(http://www.i815.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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