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200855
한자 趙鏞九
영어공식명칭 Jo Yonggu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유현리
시대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장혜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2년 12월 13일연표보기 - 조용구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20일 - 조용구 군북 시장 만세 운동 주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6월 27일 - 조용구 1년 6개월 형 선고 받음
몰년 시기/일시 1936년 7월 7일연표보기 - 조용구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68년 - 조용구 대통령 표창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0년 - 조용구 건국 훈장 애족장 추서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3월 20일 - 조용구 군북 시장 만세 운동 주도
출생지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유현리
활동지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함안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조용구(趙鏞九)[1882~1936]는 1882년 12월 13일 함안군 군북면 유현리에서 태어났으며, 슬하에 3녀를 두었다. 을사조약 이후 국권 회복에 몰두하여 가세가 기울고, 자식 넷이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는 “나라 없는 자식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자라서 왜놈의 종이 되는 것보다 차라리 일찍 죽는 것이 났다”라고 말하였다. 조용구는 조석규(趙碩奎), 조상규(趙相奎), 조형규(趙炯奎) 등과 어울려 독립에 힘썼고 특히 안지호(安知鎬), 조계승(曺啓承), 안재형(安在瑩), 이희석(李喜錫)과도 가까웠다. 고종의 장례에 다녀온 동지들에게 서울의 독립 시위 소식을 전해 듣고 사촌 조용대(趙鏞大) 집에서 군북 시장 만세 운동을 결의하였다. 조용구는 독립 선언서 수정, 전단 및 태극기 제작, 동지 규합 등 여러 일에 관여하였다. 그들은 서산 서당에서 독립 선언문과 태극기를 등사하고 원효암에서 태극기를 칠해 군북 장터로 옮겼다.

조용구는 시위 당일 아침 9시에 신창 야학교의 독립 선언식에 참석하였다. 오후 1시경 독립 선언식을 거행하고 3,000여 명의 군중은 군북면 각 지역으로 행진하였다. 시위대는 5,000여 명으로 늘어났고 군북면 경찰 주재소로 달려갔다. 일본 경찰은 시위대의 체포를 위해 소방차에 검은 물감을 타서 시위대에 뿌렸다. 그러자 군중은 더욱 강렬히 돌을 던지며 저항하였고, 일본 경찰이 주동자들에게 발포하면서 23명이 순국하고 18명이 부상당하였으며 수십 명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조용구는 4월 21일 집에서 체포되었고, 1919년 6월 27일 부산 법원 마산 지청에서 1년 6개월 형을 선고 받았다. 상고하였으나 기각되고 8월 21일 형이 확정되어 대구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복역 중 천연두를 앓고 고문으로 몸이 상하였다. 1936년 7월 7일 향년 54세로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8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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