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200853
한자 趙性基
영어공식명칭 Jo Seonggi
이칭/별칭 순팔(順八),조이수(趙已守)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하림리
시대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고은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1년 11월 1일연표보기 - 조성기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20일 - 조성기 군북 시장 만세 운동 주도
몰년 시기/일시 1919년 3월 20일연표보기 - 조성기 사망
추모 시기/일시 2002년 - 조성기 건국 훈장 애국장 추서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3월 20일 - 조성기 군북 시장 만세 운동 주도
출생지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하림리
거주|이주지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하림리
활동지 경상남도 함안군
묘소 국립 대전 현충원 - 대전광역시 유성구 갑동 산23-1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함안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함안 지역에서는 서울3·1 운동 이후 독립 시위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이 주도하여 3월 19일 함안읍 만세 운동과 3월 20일 군북 시장 만세 운동을 거행하였다. 군북 시장 만세 운동은 조석규(趙碩奎)·조상규(趙相奎)·조용효(趙鏞孝)·이재형(李在衡) 등이 계획하였다. 그들은 미리 태극기를 제작하고 인근 지역에 계획을 알리는 등 사전 준비를 하였다. 3월 20일 오전 9시 함안군 군북면 동촌리신창 야학교에서 시작되어 군북 장터로 퍼져 나갔다. 오후 1시경 3,000여 명의 군중이 만세 운동을 전개하자 현지 경찰과 마산 중포병 대대 병력들이 공포를 쏘며 시위대를 해산시켰고, 오후 5시경에는 군중이 5,000여 명으로 늘어나 경찰 주재소로 나아갔다. 사태의 급박함을 느낀 일본 경찰이 시위대에 공포를 발사하고 조준 사격을 하면서 현장에서 21명이 순국하고 18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많은 사람이 무참히 구타당하고 체포되었다.

[가계]

조성기(趙性基)[1881~1919]는 자는 순팔(順八)이고, 조이수(趙已守)라고도 하였다. 부인은 김해 허씨(金海許氏)이다. 아우는 조성윤(趙性閏)이다.

[활동 사항]

조성기는 1881년 11월 1일 함안군 군북면 하림리에서 태어났다. 한학을 공부하여 문장이 뛰어났고, 의협심이 강하였다. 고종의 장례식에 다녀온 동지로부터 서울 만세 시위 소식을 전해 듣고 조용규(趙龍奎), 조주규(趙周奎), 조용대(趙鏞大), 조동규(趙銅奎), 조석규 , 조성규(趙聖奎), 조상규 등과 함께 3월 20일 군북 시장 만세 운동을 모의하였다. 이때 조성기는 조성술, 조용태함안군 군북면 하림리, 원북리, 모로리, 월촌리, 유현리 일대의 동지 규합과 군중 동원을 맡았다.

의거 당일에는 오후 군북 냇가에서 태극기와 독립 선언 전단을 배부하였다. 3월 20일 1시 독립 선언문이 낭독되고 3,000여 명의 군중이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조성기는 선두에 서서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시위 군중을 독려하였다. 시위 군중은 경찰 주재소로 행진해 갔다. 오후 5시경 주재소에 이르니 군중이 5,000여 명에 이르렀고, 일본 군경의 공포에 맞서 군중은 투석으로 대항하였다. 이에 일본 군경은 시위대를 향하여 주모자를 골라 흉탄을 발사하여 조성기도 복부에 총탄을 맞아 순절하였다. 조성기에게는 일점의 혈육도 없었다. 순절한 이후에도 일본 경찰의 끈질긴 탄압으로 부인 김해 허씨는 도피하여 행방불명되었는데, 『함안 조씨 세보』에 이 사실이 실려 있다.

[묘소]

국립 대전 현충원 애국 지사 묘역 제4-207에 안치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2002년 건국 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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