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200831
한자 李成淑
영어공식명칭 I Seongsuk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함안군 산인면 입곡리 1132
시대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고은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24년 4월 2일연표보기 - 이성숙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41년 8월 27일 - 이성숙 육군 형법과 보안법 위반으로 1년 6개월 형 선고 받음
몰년 시기/일시 1997년 7월 9일연표보기 - 이성숙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0년 - 이성숙 건국 훈장 애족장 추서
출생지 경상남도 함안군 산인면 입곡리 1132
거주|이주지 경상남도 함안군 산인면 입곡리 1132
활동지 경상남도 함안군
묘소 국립 대전 현충원 - 대전광역시 유성구 갑동 산23-1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함안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이성숙(李成淑)[1924~1997]은 1924년 4월 2일 함안군 산인면 입곡리에서 태어났다. 함안 공립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일본도쿄에 있는 정칙 중학교를 입학하였다. 1940년 중학교 여름 방학 때 함안으로 돌아왔다. 이 시기는 중국 대륙 진출을 위하여 일본의 조선 지배가 더욱 강고하던 시기이다. 즉 민족 말살 정책이 시행되었는데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내세워 창씨 개명뿐만 아니라 민족문화를 말살하려 하였다. 이렇게 1940년대 일본 제국주의의 민족 말살 정책으로 한반도가 암흑으로 내몰리자, 이성숙은 일본 유학을 포기하였다.

그리고 1940년 9월 함안 공립 국민학교에서 운동회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듣고 태극기를 만들어 가슴에 품고 학교에 갔다. 정오쯤 운동회를 관람하고 있는 경찰 서장과 함안 군수를 비롯한 각급 기관장들과 지방 유지들이 본부석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17세의 이성숙은 조회대에 뛰어올라 태극기를 양손에 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다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1년여 동안 가혹한 고문을 받고 1941년 8월 27일 부산 지방 법원 마산 지청에서 육군 형법과 보안법 위반으로 1년 6개월 형을 선고 받아 마산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45년 광복 이후 사회의 안녕 질서를 유지하겠다는 의도로 하동 경찰서에 근무하였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일을 할 수 없어 사직하였다. 1997년 7월 9일 74세로 사망하였다. 아버지는 이호종(李鎬種)이고, 아들은 이근생(李根生)·이근덕(李根德)이며, 손녀는 이현지·이현영이다.

[묘소]

이성숙은 대전 현충원 애국 지사 묘역 제2-653에 안장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1990년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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